분노를 따라가면 보이는 것
절벽을 지나고 싶다
시각절벽을 사이에 두고 아이와 엄마가 마주한다. 유리판을 지나야만 엄마를 만날 수 있는데 유리판 위로 선뜻 몸을 옮기지 못한다. 아이가 고민한다. 그때 엄마가 환하게 웃어주면 그 미소에 아기들은 엉금엉금 손을 내 딛는다. 절벽을 불사하고 기어이 기어가 엄마에게 안긴다. 하지만 엄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면 어쩔 줄 몰라하다 처음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래가 뻥 뚫린 듯한 유리판을 보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엄마가 팔 좀 벌려 웃으며 응원해줬다고 그 위험한 절벽으로 어린 아기가 뛰어든다니. 엄마가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인 걸까, 엄마보다 아이가 엄마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 진짜인 걸까.
나도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필요하다. 따뜻하게 웃어주는 엄마, 종종거리고 있을 때 괜찮다고 눈 맞춰주며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든든한 안전기지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급문집을 만드는데 부모님들의 편지 몇 편을 실었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너댓을 불러 부모님께 편지를 받아오라 하셨고, 우리 엄마의 글도 문집에 올랐다. 엄마는 '끝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흔히 전하는 조언 같은 것인데 그때는 기분이 찝찝했다. 끓는 물에 찬물을 부으면 보글보글 올라오던 물방울이 일순간 잠잠해지듯 엄마의 첫 손편지, 설레고 기대했던 마음에 김이 샜다. 내가 끝맺음을 잘 못한다는 얘기인가. 의문이었다.
엄마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와서는 선생님이 나보고 욕심이 많다고 했단다. 초등학교에서 심부름은 담임선생님의 신뢰와 애정의 상징이었다. 그 심부름의 8할은 내 차지, 정말 예쁨 많이 받았다. 뭐든 잘하려고 한다는 뜻의 긍정적인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고 엄마 얼굴에는 흐뭇함과 흡족함이 넘쳤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 네가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신이 나서 상담 스토리를 읊었는데, 욕심이라. 난 욕심을 내 본 적이 없다. 그냥 한 건다. 그런데 엄마는 또 그걸 좋아한다. 이상했다. 욕심을 내야 하는 건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열심히 하던 내 소중한 내적 동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 아빠는 대신 해결해 주는 부모였다. 내가 너무 엄마, 아빠의 눈 안에 있는 게 이유였다. 엄마가 팔토시도 만들어줬고 아빠가 전등갓도 만들어 줬다. 그걸 들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웃으면서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하고 물으셨다.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네.”라고 해도 선생님은 만점을 주셨다. 안팎으로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그러하듯 나의 엄마, 아빠도 칭찬의 방법을 잘 몰랐겠거니 한다. 아빠는 지갑을 여는 방식으로 표현하곤 했는데 돈으로 때운 것과는 좀 달랐다. 정말이지 입은 닫고 딱 지갑만 열었는데 아빠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데려가 좋은 외투를 사주거나, 바란 적도 없는 삐삐와 핸드폰을 사들고 올 때면 ‘내가 너로 인해 기뻐서 너에게 좋은 것을 해주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빠의 기쁨은 온돌처럼 전해졌다.
엄마는 겸손하고 차분한 톤으로 사쁨이 어디 대학 갔다, 사쁨이 임용 됐다 이런 소식을 여기 저기 전화로 돌렸다. 미소가 침처럼 고여있는 말투였는데 그게 다였다. 각종 좋은 감정이 뒤엉킨 그것을 엄마만 누렸다. 정작 수고했고 고생한 건 난데 왜 엄마 혼자 누릴까.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할까.
우리 딸 수고했어.
우리 딸 그 동안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다.
축하해.
이런 말이 그렇게 어렵나. 나의 잘 한 일은 엄마의 것, 엄마와 다른 내 취향은 틀린 것. 있는 그대로의 수용과 무조건적 지지, 나의 이 비어있는 연료통은 어째야 하는 건지. 그래서 이렇게 남편을 쥐 잡듯이 잡는건가. 남편은 무슨 죄야. 아니 그런데 죄가 아주 없진 않다. 뭔가 있긴 있다. 괜한 화풀이는 아니다.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말구름이 되어 나를 따라다닌다. ’왜 항상 내가 자기에게 상처 준 말은 낭떠러지까지 가 있을까요.‘
생각은 넘쳐나는데 자신감은 없다. 뭔가 해보고 싶지만 거기까지이다. 실천이 안 된다. 뛰어들지 못한다. 나라는 인간에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위기인 것일까. 시각절벽 앞에 서 있는 아이처럼 왜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는 걸까. 듣기 불편한 말 몇 마디에 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질까, 뭘 이렇게까지 상처 받았다고 발악을 할까.
엄마가 나에게 욕심이라는 단어 대신 '노력'으로 바꿔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오니 네가 참 기특하다’ 이런 말 한마디만 보태줬어도. 그럼 내가 좀 달라졌을까.
따뜻한 미소, 격려하는 손짓, 나만 바라봐주는 눈빛, 마흔 넘어서도 왜 나는 그깟 게 필요할까. 그게 그렇게 꼭 있어야만 나는 이 절벽을 건널 수 있는 걸까. 진짜 떨어져 죽을 절벽도 아닌데.
이 가짜 절벽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