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사쁨 Jul 06. 2024

사랑한다면 트라이탄

*사진설명 : 새하얀 우유 위로 에스프레소가 퍼져나갈 때 가장 예쁠 컵




아들 일기


택배가 왔는데 엄마가 내 거라고 했다. 야호. 내 택배가 오면 기분이 좋다.


엄마가 신기한 컵을 샀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엄마가 그러는데 여기 물을 담으면 물이 다 보이고 우유를 담으면 우유가 다 보인다고 했다. 새로 산 컵으로 물을 마시는데 엄마가,


"하이야, 하이 물 마실 때도 하이 얼굴 다 보. 오물오물 입술 움직이는 거 엄청 귀엽다. 엄마가 그래서 이 컵 산 거야. 하이 얼굴 계속 보려고."


엄마는 나를 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다.




엄마 일기


이놈의 설거지. 가정 꾸려 살아보니 밥 해 먹고 치우는 게 제일 일이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하느라 내 손으로 밥 할 기운도 없고, 그 뒷일까지 하자니 종종 짜증이 난다. 집밥이래 봤자 하루 한 끼인데 그것도 벅차다. 배민이 괜히 잘 되는 게 아니다. 


식기세척기가 있어도 설거지는 에브리데이 에브리타임 항상 있다. 모든 종류의 그릇을 소화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모든 식기를 식세기용으로 바꿔야겠다, 하나씩 하나씩. 일단 플라스틱 컵부터 없애자!


언제나처럼 택배를 보자마자 하이가 "내 거야?" 하고 묻는데 느닷없이 "응. 이거 하이 거야."라고 해버렸다. 왜 그랬지?


최근에 에어프라이어도 바꾸고 프라이팬도 새로 장만하느라 택배가 자주 왔는데 그때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것이냐 묻던 하이한테 마음이 쓰였나 보다. 무의식이 이렇게 무섭다.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빚어내는 색의 조화를 생각하며 주문해 놓고 꺼라니. 그렇게 트라이탄 컵은 하이 것이 되었는데 기대감을 드높이고 싶은 마음에 이 컵에는 무엇을 담 든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신기하고 놀라운 컵이라고. 말이 청산유수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컵이 담기는 음료만 투명하게 비춰주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컵으로 가려졌을 하이의 얼굴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데 한 모금 한 모금 꼴딱거릴 때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입술 어쩔 거냐고.


"하이야, 하이 물 마실 때 입술 움직이는 게 너무 귀여워. 엄마가 그래서 이 컵 산 거야."


엄마가 되면 거짓말이 느는가. 집에 들인 이유는 구라. 너무 귀여운 건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컵으로 가려지는 그 찰나의 시간조차 용납할 수 없다면 이거다. 트라이탄.




매거진의 이전글 음쓰를 처음 버리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