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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사쁨 May 25. 2024

BGM은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가로 젓는다. 지금 먹지 않으면 다 녹을텐데 아이들 손사레에 두 번 다시 권하지 않는다. 설레임 여섯 개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반티를 하나같이 벗어 던지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다리를 툭툭 털고 팔을 쭉쭉 늘리 비장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어 발목을 빙그르 돌려준다. 금이는 오늘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고 했다. 세정인 "선생님 너무 떨려요." 한다.     


 그그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어달리기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마지막 경기다. 들어는 봤나 모르겠다. 체육대회 깍두기. 푸른 반 벼리는 깍두기 자격으로 줄다리기에 참여했고 무려 이기기까지한 상태. 지금 이 순간 우리반에 서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나, 포기하지 않은 담임이 있다. 오전 경기를 꼴지로 마쳤지만, 잘 해봐야 2위라고 하면서도 근거 없이 비밀리에 내적 기대감이 풀장전된 상태. 포기모르지만 간이 작은 편이라 방정 맞게 발구르며 호흡을 고르고 있다.


 여자 선수가 시작한다. 여자 남자 순서로 번갈아 뛰어 남자 선수가 피니 테잎을 끊는다. 디어 시작이다.


탕!


  주자 세정이는 작년에도 우리반 첫 주자였다. 그 실력은 이미 알고 있다. 가볍게 치고 나간다. 얇고 긴 다리를 죽죽 내어 뻗으며 치열하지 않게 차이를 만들고 간격을 벌린다. 남자 첫 주자 진이에게로 바톤이 넘겨진다. 우리반 자체 선발전 결과 선수로 뽑힌 실력자. 차이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선두다. 어 달리기는 순위가 높을 수록 흥분된다. 아 미치겠네.


 이제 령이로 이어진다. 장애물 달리기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훌라후프를 못 돌리는 관계로 갑자기 이어달리기 선수가 되었다. 여자 아이들 중에는 빠른편이긴 하지만 두 번째 주자와의 간격이 좁혀진다. 아. 령이가 바톤 터치 지점이 가까워 지자 속도를 줄여버린다. 안 돼 안 돼 안 돼. 말 해 뭐해. 안 된다. 역전이 되어 버렸다. 우리반의 뇌관 신이 차례. 작고 날렵하다. 4월에 학교 나오기 싫다고 19일 중에 열 번을 결석 또는 지각했지만 우리 아들이랑 닮은 덕에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품고 있는 아들같은 놈. 선두로 달리는 아이와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보면 안다. 신이가 이 악물고 뛴다.


 이제 여자 마지막 주자 금이. 승부욕의 여신 되시겠다. 안 봐도 뻔하다. 대충 달릴리가 없다. 뒤쳐져 달리는 꼴을 못 참을게 분명하다. 3반 주자에게 바짝 붙어 달리던 금이가 간당간당 역전에 성공했다. 3반 주자와 우리반 금이가 거의 동시에 들어간다. 그리고 현이, 우리의 현이 차례다.


 현이가 누구인가. 2학년에서 가장 빠르기로 소문난 우리의 희망, 나의 희망 현이. 푸른 반 벼리 다음으로 내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한 우리 현이. 하겠다고 했다가 허벅지 햄스트링이 올라왔다고 했다가 괜찮다고 했다가 다시 무릎 어디 염증이 있다고 했다가 모르겠다고 했다가 3학년이랑 연습 경기에서 이겼다고 좋아했다가 또 누구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가 사실 다른 반 애들 속이려는 페이크라고 했다가 페이크 였는데 이제 진짜 안할거라고 했다아오 그냥 이새ㄲ...


 현이는 우리 반의 보석이라며 우리 아들 좋아하는 말로 어르고 달래도 현이의 토라짐은 끝이 없었고, 자기가 다치고 아프다고 해도 자기 걱정은 안 하고 체육대회 걱정만 한다며 제 가치를 모르고 망발을 쏟아낸 주인공 현이. 잘 뛰니까 그르지 이스끼야. 심사가 꼬일 때마다 이어달리기 출전 의사를 손바닥 뒤집듯 수도 없이 번복했다. 그 현이가 뛴다. 우리 반의 마지막 주자로.

              

 누가 발로 찼나. 주님이 차셨까. 분명 금이와 3반 주자가 동시에 들어갔는데 발에 로켓이 달렸나 현이가 쁘엉 하고 튀어나온다. 미쳤네. 다들 체력이 좋아져 실력이 비슷해 졌다고 엄살을 부리더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 다시 처음처럼, 다시 간격이 벌어진다.


 옆에 서 계시던 체육선생님이 차분하게 물으신다.


"제일 앞에 몇 반이야?"

"우리 반! 우리 반! 1반! 우리 바아아아안!"


 한 번만 말해도 되는데. 진정이 안되면 손가락으로 말해도 되는데. 손가락 열개 쫙 펴고 눈깔 희번덕이며 악쓸 일은 아닌데. 체육선생님은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학년 부장님이 발작하지 말랬는데 또 한다 발작. 리 바아아아안 하는 악다구니와 함께 경기는 끝났다. 현이가 테잎을 끊었다.1등이다. 그리고 종합 우승이다.  


 승.


 반장이 너무 좋아한다. 반장이랑 포옹을 두 번이나 했나. 올 해는 꼭 우승을 해야했다. 정말 필요한 우승이었다. 폐회식 하는 중에 스탠드 쓰레기는 내가 다 치웠다. 뒤꿈치가 땅에 닿질 않는다. 엉덩이가 방실방실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데 조절이 안 된다. 어깨 결림이 사라졌다. 온 몸에 체지방은 다 빠진 느낌. 이렇게 좋은 우승은 올 해가 처음이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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