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히 엉기며 세상의 모든 색을 지운다.
파란 하늘마저 눈의 기세가 익숙한 듯 제 빛을 사위고,
세상은 온통 하얗다.
눈은 하늘과 땅, 그 사이 모든 구별을 거부한다.
온갖 경계에 달라붙어 그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길 가의 창에 비친 내 어깨를 보니, 시린 손에 꼭 쥔 우산이 무색하다.
진작에, 내 코트도 그 경계를 잃고 있다.
이게 차가운 건지, 포근한 건지.
어깨에 갈앉은 눈을 보다 코 끝이 시큰해졌다.
내일이면 녹아 모두 제 빛을 되찾더라도, 나만은 이대로 지워지면 좋겠다.
네게 가닿지 않은 나의 사랑에도 무겁게 엉겨붙어라.
대답을 듣지 못해, 독백이 된 마음들에도 재빨리 달라붙어라.
뒤엉키고 떨어져, 누구의 발이든 밟히고 깨져라. 녹아라. 멀리 흘러라.
그 와중에는 네가 아닌 눈 탓을 할 테니까.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니, 눈의 탓이라고.
눈 때문에 너마저 잃은 것이라며 뒤돌아 도망치겠다.
걸어온 자욱마저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중간 어디선가 그 자욱마저도 끊기겠지만.
탓 할 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나는
긿 잃은 것 마저도 눈 탓 한다.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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