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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Sep 29. 2021

아니 벌써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산울림     

 

 밤을 새 본 사람은 안다. 정확히는 밤을 새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안다.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현실과의 단절된 그 기분을.      

 


 나는 자칭 ‘대한민국 게임 1세대’다. 98년도에 대학교에 갔다. 우리나라에 게임방이란 공간이 전국에 깔리기 시작한 때가 딱 1997년, 1998년이었다. 몇몇 게임을 주요 콘텐츠 삼은 게임방들이 말 그대로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의 인터넷 게임 시대는 정확하진 않지만 2010년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학교 시절 전체와 20대 중 후반을 게임에 거의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방에서 밤을 새운 건 일상다반사였다. 우주 대서사시를 표방한 sf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도 했었지만 주로 한 게임들이 중세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엘프가 나오고 드래곤이 나오는 그런 게임 말이다.      

 


 학교를 마치고 알바를 마치고 혼자 혹은 친구들과 게임방에 자리를 잡는다. 친한 친구들이 그렇듯 농담 반, 욕 반을 섞어 가며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을 한지 한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간식도 사 먹는다. 라면도 좋고 과자도 좋다. 음료수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지금은 게임방에서 식당에 버금가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지만 그때는 라면, 과자, 음료수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맛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먹는 탄산음료와 과자의 맛이란….     

 


 그렇게 밤 9시 정도가 되면 결정을 해야 된다. 게임을 더 하다 갈 건지, 이쯤에서 정리하고 집에 갈 건지. 더 할 거면 확실히 더 하는 쪽으로 결정한다. 즉, 밤을 새우기로 한다. 보통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10시간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미리 결제하고 밤새 게임을 즐긴다.      

 


 게임방에서 밤을 새 게임하는 사람들에게 밤 10시, 11시는 초저녁이다. 자정을 지나 새벽 1~2시 정도가 피크다. 새벽 3시 정도 되면 조금은 무료해지고, 새벽 4시쯤 되면 졸리기 시작한다. 어디에서 봤다. 인간이 신체적으로 가장 취약해지는 시간대가 새벽 4~5 시대라고 했다. 정확하게 그즈음 졸리기 시작한다. 게임방 의자는 편안하기에 그냥 의자에 거의 반쯤 누워 잠깐 눈을 붙인다. 조금 이르면 새벽 5시, 조금 늦으면 새벽 6시 정도에 깨서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게임을 한다. 두 시간 정도 뒤 면 미리 결제한 시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침 8시가 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밖엘 나오면 학교 가는 학생들, 출근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아침을 시작하는 여러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아침에 날이 좋아 해라도 쨍쨍하게 비추면 일단 눈이 아프다. 밤새 게임을 즐겁게 했지만, 아침을 기운차게 시작하는 이들을 보면 스스로 약간 한심스럽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여하튼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때는 밤새 게임을 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세상과 단절된 아니 현실의 세상이 아닌 가상의 세상으로 들어가 있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꽤 깊은 새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자는 시간에 혼자 혹은 친구들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탐험하는 그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인지 원래 늦게 자는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깊은 새벽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좋다. 지금은 게임을 못 하고 있지만 그 시간에 무언 갈 하면서 보내는 것 자체가 좋다.      

 


 새벽의 그 고요함. 간혹 밖에서 무심하게 들리는 지나가는 차 소리, 가을이면 귀뚜라미 소리, 자다가 누가 일어나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소리 정도 외에는 특별히 내 신경을 건드릴 것이 없는 새벽이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다음 날, 보통 늘 피곤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이 좋다.     

 


 산울림이라는 밴드를 잘 모르기에 특별히 좋거나 싫은 감정이 없다. 그러니 이 밴드의 여러 노래 중 하나인 ‘아니 벌써’ 역시 딱히 싫을 이유가 없다. 다만 ‘아, 벌써 새벽시간이 흘러가고 아침이 밝아 오는구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 조금은 힘든 현실로 돌아와야 되는구나.’ 하는 상황을 떠오르게 하는 그 첫 가사가 신경이 쓰일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밤새 게임하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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