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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Oct 08. 2021

‘관종’의 시대

 세상에 나를 외치다.

 세상에 외치다 나를.

 나를 세상에 외치다.

 나를 외치다 세상에.

 외치다 나를 세상에.

 외치다 세상에 나를.     

 


 누가 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 같기도 하고, 광고 카피 같기도 하다. 여하튼 누군가는 했겠지. 그나저나 어순을 어떻게 잡아도 말이 되는 ‘한글, 최고!’      

 


 우리는 스스로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선 내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다. 내가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때가 2014년이다. 그전까지는 2g 폰을 썼다. 그 이름도 유명한 아는 사람은 아는 ‘모토로라 레이저’ 이 휴대폰을 8년 동안 썼다. 2014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면서 카톡을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다 망가져 가는 그래서 전화만 겨우 되는 2g 폰을 썼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일단 휴대폰 자체도 너무 오래 써서 많이 망가져 있었고, 보다 문제가 됐던 점은 업무를 보는 과정에 제약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웬만한 업무를 다 보고 카톡 등을 통해 사진이나 서류 등을 주고받고 했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나 혼자만 생각하면 정말 망가져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민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결국엔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어쩔 수 없이 업무를 위해 바꿔야 했기에 가장 저렴한 기기와 요금제로 선택을 했다. 기기는 그렇다 치고 기억에 의하면 데이터가 500메가였던 것 같다. 그 데이터마저도 한 달 지나고 나면 남았다. 업무를 위해 카톡을 쓰고 서류나 사진 정도만 주고받으면 됐기에 많은 데이터가 필요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한다든지, 유튜브 등을 보는 행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 부분은 작은 화면으로 무언 갈 보는 게 영 탐탁지 않은 성향도 한몫했다.     

 


 이런 내가 SNS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SNS인 카톡은 업무와 문자를 대체하는 의미로 많이 썼지만 그 이외의 SNS는 여전히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물론 더 파고들어 생각해 본다면 SNS의 선구자격이라 할 수 있는 ‘싸이월드’를 대학시절에 조금 하긴 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바꾸기 전에 어떠한 이유로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을 만들긴 했다. 아마 2011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연도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을 보면 계정을 만든 이유가 명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도 시작하면 한 참 진행될 소재이기에 다른 글에서 기회 되면 풀어 보도록 하겠다. 여하튼 필요에 의해 계정은 만들었지만 그때 이후로 활용을 거의 안 했기에 계정은 죽어 갔다.     

 


 이랬던 내가 지금은 프리미엄급의 스마트폰을 사용하진 않지만 무제한 요금제로 데이터를 쓰고 있다. 작은 화면으로 뭘 보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라는 내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산다. 그리고 죽어 있던 페이스북 계정을 살렸고, 더 나아가 ‘인스타그램’까지 하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그 규모가 미미하지만 ‘카카오스토리’도 조금 하고 있다.     

 


 사람은 그대로지만 SNS 환경은 천지개벽의 수준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바꿨을까? 바로 ‘관종’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관종이 뭐 좋은 거라고 관종이 되고 싶었을까. 우리는 관종을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쓴다. 즉, 딱히 좋은 이미지가 아닌 관종이 왜 되고 싶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부정적인 그런 관종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결국엔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조금은 자극적이지만 관종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우리는 가족부터 시작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친구 또는 동료 그리고 연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관심으로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관심이라는 부분이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전의 시대엔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관심을 한정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그 규모가 다르다. 말 그대로 ‘글로벌’하다. 글로벌한 관심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들이 바로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일 것이다. 보다 다양하면서 조금 더 매니악한 플랫폼들은 내가 잘 몰라서 나열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이런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외치고 있다. 나를 봐 달라고 외치고 있다. 물론 꼭 관심의 의미로만 이런 도구들을 활용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삶을 기록하고 싶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적인 플랫폼에 내 삶을 ‘게시’하는 순간, 많건 적건 간에 불특정 한 다수가 내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인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글, 영상 등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그러니까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관심은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재돼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노트에 글을 쓰고, 사진을 스크랩하는 등의 불편함을 그런 플랫폼들을 이용하면 조금 더 수월하니까 활용한다고 할 수도 있고, 실제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관종이라고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이 타인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100% 외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나에게 돌아와서 주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관심을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던 내가 왜 그 규모를 키워 관종이 되려 했을까?     

 


 바로 ‘작가’가 되고 싶은 꿈 때문이다. 글 쓰는 재주가 없기에 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럼 노트북을 켜고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해 혼자 쓰면 될 일이었다. 난 펜을 잡고 직접 글 쓰는 걸 너무 힘들어한다. 손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 애초에 직접 글을 쓰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하튼 혼자 일기 쓰듯이 노트북에 기록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부족하지만 확인받고 싶었다. 글을 잘 쓰고 있는 건지, 잘 배우고 있는 건지 확인받고 싶었다. 잘해보라고 용기를 주는 가족에겐 발전적인 피드백을 바랄 수가 없다. 되지도 않는 글 쓰겠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겠는가? 정말 아니라면 그만두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해 보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냉정히 때려치우라는 가족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혼자 쓰게 되면 확인받을 경로도 만만치 않고 의지가 쉽게 꺾일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 혼자 글을 쓸 때는 한 달 정도 열심히 쓰다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흐지부지된 의지를 다시 부여잡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브런치’라는 공간을 알게 됐다. 공개적으로 글을 게시할 수 있는 플랫폼이었다. 더불어 블로그처럼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이 부분이 뭐랄까 약간의 호승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브런치 작가가 됐고, 열심히 글을 써 올렸다. 그리고 보다 많은 관심을 바탕으로 빨리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에 나를 알릴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 도구는 이미 널려 있었다. 더욱이 처음 보는 도구도 아니었다. 잠시나마 써 보기도 했던 도구들이다. 그런 도구들을 다시 집어 들어 내 글을 확인받고 싶은 관심의 욕망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매일 글을 쓰고, 브런치에 게시하고, 홍보를 목적으로 동시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그리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엔 글 쓰는 과정,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도 올리고 있다. 아무도 안 봐도 상관은 없다. 누군가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올리는 거긴 하지만 상관없다. 막연한 기대 때문에 버텨지기도 한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도구들은 상당히 규모가 큰 글로벌한 도구들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분명히 봐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나는 글을 쓰고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난 관종이다. 그리고 이런 ‘관종’의 시대가 좋으면서 반갑다. 물론 이런 장치들을 만들어 둠으로써 멱살 잡듯이 잡아 올려도 자꾸 고꾸라져 가는 의지를 끌어올리기 위함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끝끝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해당 플랫폼들의 데이터가 저장되는 공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내 글은 분명히 세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없어져도 그 글들의 초안은 내 노트북에 남아 있기에 괜찮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관종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글을 통해 나를 세상에 알리려면 적극적인 관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난 오늘도 글을 쓰고, 세상에 글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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