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하는 늑대 Oct 09. 2021

결혼할 사람

 나는 결혼을 했다. 올해로 결혼 3년 차를 조금 넘어 서고 있다. 아내랑 2년 조금 안 되게 연애 후에 결혼을 했다. 왜 지금 이 사람과 결혼을 했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그렇게 됐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왜 나를 만났는지?’, ‘왜 나랑 결혼했는지?’ 뭐 이런 질문을 아내가 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해 본다면 아내를 만났을 때 편안했다. 이전의 여자들을 만날 때는 한껏 멋을 부렸었다. 몸에 힘이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내를 만날 때 멋을 안 부린 건 아니다. 어쩌면 비슷한 수준으로 멋을 부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자기와의 만남이 그냥 편하기만 했냐고 볼멘소리를 내긴 하는데 나는 편했다. 아내를 무시한다거나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음에서 오는 편안함이 아니라 그 이전과 비슷하게 신경을 쓰고 만났음이 분명 한대도 편안했다. 그래서 보다 솔직한 내 본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연애를 했다. 상대적으로 내가 일을 더 많이 했기에 일을 마치면 아내 집으로 찾아갔다. 거의 매일 찾아갔다. 일 특성상 늦게 마치고 찾아 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매일 갔다. 늦은 밤에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찾아서 갔다. 아내가 술을 별로 하지 않는 점이 못내 아쉬웠지만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함께 했다. 늘 가는 곳이나 하는 것이 뻔했지만 그럼에도 매일 만났다. 편안하지 않았다면 그 시간들이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조금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시를 벗어나 말 그대로 싸돌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아버님께서 보자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점심 약속을 잡았다. 겪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의 부모를 만나고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다. 아버님께 첫인사를 드린 게 어제 같은데 예식장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오늘의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결혼을 한 건 그냥 그렇게 된 것이 맞다.    


 이 부분을 하기 싫은데 억지로 혹은 마지못해 한 걸로 오해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별 탈 없이 믿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무언의 동의가 있었다는 쪽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쑥스럽지만 그 밑엔 사랑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감정이 깔려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아내를 만나고 결혼하기 전까지 사실 결혼은 포기했었다. 한동안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사람 만나는 부분에 있어 적극성을 띨 나이도 지난 시점이었다. 애초에 결혼을 꼭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살다 가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하며 혼자 나름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어~ 하다 결혼까지 하고 예쁜 딸아이까지 키우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결혼할 사람은 따로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이 조금 웃긴 것 같다. 결혼할 사람이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면 그 많은 연애와 사랑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저 정해진 결혼 전에 연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리 사람들의 연애와 사랑은 애절한 것일까. 오랜 시간의 역사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아파했을 텐데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바보라서 겪고 또 겪었음에도 연인과의 사랑과 관련된 경험은 DNA에 새기지 않는 것일까. 아니 그렇다면 오랜 역사 동안 전 세계 각 지역에서 쏟아지는 사랑노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차피 정해져 있다면 사랑노래 따위 공염불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이 소재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또 마침 오늘 아내와의 야식을 먹는 도중에 발생했다. 야식을 먹으며 우연히 모 연예인 커플이 오랜 시간 동안 사귀다 헤어진 이야기를 했다. 한쪽이 헤어지고 얼마 뒤에 1년 정도 사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오래 연애하더니 헤어지고 다른 사람하고 1년 정도 연애하다 바로 결혼하네. 역시 결혼할 사람은 따로 있나 봐.’라는 대화가 이어졌다. 아내가 이야기를 했고, 난 들었다. 초장 양념에 잘 무쳐진 골뱅이와 야채를 한 입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결혼할 사람이란 게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골뱅이를 야무지게 먹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 여자가 나와 결혼할 사람이었나? 그래서 결혼도 포기한 시점에 운명처럼 짜잔! 하고 나타난 건가.      

 


 나도 모르게 그렇구나 하면서도 백 퍼센트 수긍이 가지는 않았다. 아내를 만나기 전의 여자들과의 기억을 못내 아쉬워하는 건 아니다.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고 지나 생각해 보면 죽지 못해 끙끙 앓을 일들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정도의 기억들이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때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나 스스로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여하튼 결혼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게 맞다 면 누군가를 만나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과거의 시간들은 뭐가 되는 건가?     

 


 그저 정해져 있는 결혼을 위한 요즘 말로 하면 ‘빌드업’을 위한 쓰고 버릴 소재였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고 아파해 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걸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랑 노래는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결혼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말속엔 보상심리 혹은 당위성 그리고 자기 합리화 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를 예로 들어 보면 아내 이전에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그때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 사랑과 아픔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혼자였던 시간에 의한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던 시간도 많았다. 이런 경험과 시간을 보상받고자 ‘그래,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렇게 힘들었구나. 자연스럽게 운명처럼 내 앞에 이 사람이 나타나려고 그 많은 시간이 지났던 거구나.’하는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당위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오랜 시간 동안 사귀다 헤어지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결혼한 연예인 이야기를 보자. 비단 연예인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 사귀었으니까 저 둘은 결혼하겠지 하는 당위성을 당사자들이 아닌 제삼자들이 오히려 더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가리고자 결혼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당위성과 관련된 이 부분을 당사자들에게 옮겨 적용해 보면 자기 합리화로 연결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온 자신과 상대에 대한 미안함 등을 달래기 위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     

 


 결혼할 사람이라서, 결혼할 나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시간 그 공간에 있었고, 상대 역시 공교롭게도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면서 서로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렇게 바라본다고 모두가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본 그들이 손을 맞잡거나 서로를 안아 줄 때에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혼돈 속에 사람이라고 하는 나름의 질서가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혼돈 속의 어마어마한 우연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결국엔 그렇게 된 이유가 운명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관종’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