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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04. 2021

가족의 무게

 ‘카톡, 카톡, 카톡, ….’ 아침부터 분주하게 카톡이 운다. 무슨 일인가 하여 들여다보니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카톡방에 대화가 오가고 있다. 가장 친하지만 그래서 무던한 건지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만 대화가 오가는 카톡방이다. 대화 내용을 보니 서울에서 내려와 살던 친구가 집을 옮긴다는 이야기이다. 짐을 조금만 더 옮기면 되는데 도와 달라는 내용이다. 뒤늦게 대화를 봐 다른 친구가 가기로 했다. 나는 하릴없이 시답지 않은 농담 몇 마디 주고받고 말았다.     

 


 약간의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여 그냥 넘기기 뭐해 소소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사선물엔 화장지가 제격이고, 적적한 밤에 맥주 한잔 하라고 내가 좋아하는 수입맥주 4캔까지 더해 선물을 준비해 말없이 가기로 했다. 이사 당일, 원래 오기로 한 친구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친구는 적잖이 놀랬지만 오래된 사이답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욕을 섞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기로 한 친구를 기다렸다. 얼마 후 친구가 왔고, 짐을 옮기고, 이사 날에 걸맞게 짜장면 하나 시켜 먹으려 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술도 안 마셨지만 해장국을 먹었다.     

 


 뻔하면서 늘 하는 질문과 그에 걸맞은 식상한 대답이 오고 가는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더 젊었더라면 같이 당구장도 가고 게임방도 가고 했을 텐데, 그러기엔 조금 먹은 나이들이 부담인지 헤어졌다. 사실 나이보다는 각자 집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책임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모처럼 쉬는 날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집에서 아이를 혼자 보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친구들 역시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누구 하나 서로를 타박하지 않으며 아쉬운 듯 괜찮은 듯 돌아 섰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그런가. 돌아오는 길에 이사한 친구 생각이 더 났다. 이사를 한 친구 상황이 아프다. 그래서 친구 마음도 많이 아프다. 친구 어머님께서 어느 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머리를 크게 다치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인해 친구는 가족의 책임을 넘은 무게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책임과 무게는 느낌이 다르다. 책임은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반면 무게는 가슴을 짓누른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크다면 역시 문제겠지만 어깨에 짊어진 짐은 앞을 보고 향해 나아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가슴을 짓누르는 짐은 무얼 할 수가 없다. 누군가 들어내 준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 도움의 손길마저 외면한다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 가슴을 짓누르는 짐을 보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원망하고 세상을 향한 분노만 쌓아갈 뿐이다.     

 


 세상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를 돌보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들로 인해 때론 개인이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인간들이 오래간 살아오면서 사회를 이뤄 가기 위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들이 모든 개개인을 생각한 이치냐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연한 이치니까 당연히 그래 왔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 개인을 지우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누구나 이런 책임과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경중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역시 상대적일 뿐이다. 사람이 간사해서 다른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보다 내 손에 박힌 가시 하나를 더 아파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경중은 논할 바가 못 되고 누구에게나 짊어진 책임과 짓눌리는 무게는 있을 것이다. 그중에 단연 최고는 가족의 무게가 아닐까 한다. 단순히 부모로서의 책임, 자식 된 도리 이런 걸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부부의 연을 제외하면 가족이란 조직 자체가 내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력한 결속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책임과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가족 구성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분명함에도 가족의 무게 앞에선 개인의 존재 가치는 새털보다도 가벼워질 때가 많다. 조금은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개인이 평생을 쓸 이름을 그 누구도 스스로의 뜻에 의해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순 없으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일정 나이까지 쓰다가 누구나 한 번은 특별한 절차 없이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개인과 가족, 사회를 위해서도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한 이치로서 굳어져 온, 그래서 근본이라고 이야기되는 가치들. 절대 흔들려선 안 되고 흔들어도 안 되는 가치들조차 이 사회를 이루는 진정한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을 위해선 흔들리고 뒤집어질 때도 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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