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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04. 2022

헤어드라이어

 나는 머리가 짧은 편이다. 요즘에 그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 ‘스포츠머리’.  물론 예전의 스포츠머리처럼 짧은 건 아니지만 여하튼 짧은 편이다. 30대 중반까지 자연스레 가르마가 타지는 정도의 길이를 유지하다 한 번 짧게 잘라내고 지금까지 비슷한 길이를 유지 중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머리를 짧게 하고 싶었는데 관리할 자신이 없는 게으름으로 길러 오다 머리를 해 주시는 분의 독려(?) 비슷한 걸 받고 용기 내 잘라 봤다.



 처음엔 엉망진창이었다. 왁스를 제대로 바를 줄 몰라 뭐랄까 덥수룩한 게 머리를 안 감은 듯,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멋들어지게는 아니지만 최소한 정리된 모습으로 머리 매무새를 만질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됐다. 물론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있다. 참고로 세상 편하다.



 지금은 짧으니까 더 그런데 예전에 머리가 상대적으로 길던 시절에도 헤어드라이어를 쓰지 않았다. 머리를 감고 나오면 수건으로 벅벅 닦아 내면 그만이었다. 잘 말리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을 비웃듯이 열심히 수건으로만 물기를 닦아내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 머리 혹은 모근 건강(?)은 지금으로선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탈일 정도다.



 드라이뿐만 아니라 염색도 살아오면서 한 번을 했나 싶다. 왁스를 비롯한 헤어제품도 거의 바르지 않았고 타고나길 숱이 많은 것도 한몫을 했는지 머리 해주시는 분들마다 모근이 이렇게 건강할 수 있냐며 놀라기 일쑤였다.



 그런 나에게도 헤어드라이어는 있었다. 혼자 살던 시절에 엄마가 쓰라며 챙겨 준 새 헤어드라이어였다. 엄마가 애써 챙겨 온 터라 받기는 받았는데 딱히 쓸 일은 없어 서랍장 구석 어딘가에 박아 뒀었다. 잊혀 가던 헤어드라이어를 소환해 낸 건 다름 아닌 당시의 여자 친구였다. 지금의 아내 되시는 분이다. 집에 놀러 와서는 어쩌다 그 헤어드라이어를 찾았는지 “어, 헤어드라이어를 써?” 묻기에 아니 그냥 이만저만해서 있는 거다. 필요하면 가져가라 해서 여자 친구가 가져간다고 주인 잘못 만나 서랍에 처 박혀 있던 헤어드라이어는 그렇게 구조가 됐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헤어드라이어는 딸아이의 머리를 말리는 데 쓰이고 있다. 어이가 없을 정도다. 살면서 관심도 없던 물건, 당연히 쓸 일도 없던 물건, 다만 엄마의 수고가 미안해 마다하지 않고 곱게 처 박아 두었던 물건인데 여자 친구의 머리를 말리는 걸 넘어 그 여차친구와 함께 낳은 딸아이의 머리를 매일 말리는 과업을 수행 중이라니...



 흔히 사람일 모른다고 하는데 물건일 모른다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다. 어쩌면 결혼을 할 줄 몰랐던 정확히 말하면 포기했던 한 남자의 마음과 몇 년 여 간의 거짓말 같은 삶을 헤어드라이어가 고스란히 담아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다 말려주면 그러지 말라고 해도 헤어드라이어 줄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본연의 임무인 머리 말리는 것 외에 장난감으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딱히 바라지도 않은 주인 곁을 묵묵히 10여 년간 지켜 준 헤어드라이어에게 고마워해야 되나 아니면 그 시간 동안 분에 넘치게 결혼도 하고 딸아이도 키우고 있는 스스로를 기특하다고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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