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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May 29. 2021

그래도 장미는 핀다.

 불혹不惑, 미혹되지 아니함, 나이 마흔을 일컫는 말이다. 내 나이 어느덧 마흔 하고도 넷이다. 나이 먹는 부분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럽고도 완숙한 한 살 한 살의 채워짐이 좋다. 다시 못 올 지나간 시간의 추억이 다소 아쉬울 뿐, 파여 가는 주름도 늘어 가는 흰머리도 한 편으론 대견스럽다. 잘 살아왔건 못 살아왔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증명해주는 시간의 훈장 같아 싫지 않다.     

 

 그런데 과연 마흔을 넘은 나이에 걸맞게 삶에서의 여러 유혹들에 미혹되지 아니한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이를 먹을수록 미혹됨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은 것 같다. 익히 알겠지만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군자로 추앙받는 공자孔子가 한 이야기다. 성인군자에 한참 못 미치는 지극히 평범한 내가 어느 정도 유혹에 휘둘리는 건 나이에 관계없이 너무나도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그걸 덮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실이니까.      

 

 조금 더 변명을 해 보자면 공자가 불혹을 이야기한 시대의 마흔과 2천 년도 더 지난 지금의 마흔은 다가오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정말 단순하게 계산을 한 번 해 보자. 환갑還甲만 돼도 오래 살았다고 축하하던 시대의 마흔을 백세百歲시대로 향해가는 지금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대략 육십六十대 중후반의 나이가 된다. 그렇게 보면 난 아직 20여 년은 더 유혹에 휘둘려도 된다는 궁핍하고도 옹색한 변명을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랴. 이렇게라도 해야 부족한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유혹의 근원을 생각해보면 불안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내 삶의 불안, 어디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이니 어찌 보면 태생적으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 불안으로 인해 진화, 발전해 온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란 종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불안에 더해 내 삶의 직접적인 불안의 씨앗은 고등학생 시절에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왕년에 한가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소싯적에 공부를 꽤 잘했다. 부모가 시켜서가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저 혼자 잘했다. 부모님은 말은 안 했지만 아들을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아들이 무슨 배짱인지 고등 2학년 시절부터 공부를 등한시했다. 자신감이기도 했고, 자만이기도 했다. 보기 좋게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공부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야지 해야지 하는 공염불만 외다 고등 시절을 마무리했다. 그때부터였다. 불안인지, 불만인지 뭔지 모를 정돈되지 않는 마음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내 부유浮游하기만 했다.     

 

 성적에 맞춰 간 대학은 졸업장이나 따자 하는 마음으로 한량처럼 대충 술이나 마시며 다녔고,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이 졸업한 후엔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했다. 내 속도 속이지만 바라보며 이렇다 할 잔소리 한마디 못하는 부모 마음은 더 탔으리라. 당신들에겐 누구보다 잘난 아들인데 자리를 못 잡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짧다고 하기엔 조금 길고 길다고 하기엔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지금까지 이렇게 쌓아 온 삶 속의 불안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같이 알알이 박혀 있다. 이렇게 불안을 잘 키워 나이 사십四十이 넘어서도 유혹에 휘둘릴 거였으면 차라리 출가를 해 수도를 통해 명승이나 될 걸 그랬나 하는 가당치도 않은 생각도 해 본다.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건지? 사업을 한 번 해 봐야 되는 건지?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사고 치듯이 멋대로 살아봐야 되는 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불안이 내재된, 진흙이 가라앉은 흙탕물 같은 마음으로 우선은 먹고살아야 하기에 비참하지만 삶을 연명하듯 일을 하러 나선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곳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앞 울타리에 빨간 장미가 탐스럽고 당당한 모습으로 만개해 있다. ‘어, 장미가 피었네. 아, 5월이구나.’ 하며 힘없는 어깨를 인양하듯 끌고 걸어갔다. 불안에 치여 마음에 생기는 없는데 빨간 장미는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후변화다 이상기후다 뭐다 해도 5월이 되니 여지없이 장미는 그 빨간 꽃잎을 힘 있게 펼쳐 냈다. 가히 5월의 여왕의 풍모라 할만하다. 위엄 있는 당당한 여왕의 풍모 속엔 유혹이나 미혹이나 불안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뿌린 내린 그 순간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그렇게 존재한 것처럼 5월이면 내가 이 계절의 주인공이다 하고 선언하듯이 스스로를 피워 낸다. 그 당당한 아름다움에 취해 이기적인 인간들이 꽃을 꺾어 가기도 한다. 그래도 가지는 뿌리는 흔들림 없이 다시 올 5월을 준비하며 찬탈당한 왕위를 되찾듯 장미를 피워낼 것이다.     

 

 당당함을 바탕으로 미혹되지 아니하고 5월이면 언제나 늘 스스로를 피워 내는 장미의 여왕다운 풍모를 불안한 마흔셋 인 나는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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