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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May 14. 2023

꽃을 샀다.

 얼마 만에 산 꽃 인지 모르겠지만 꽃을 샀다. 두 명의 여자에게 줄 꽃을 샀다. 난 능력이 있는 남자기 때문에 동시에 두 명의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 아내와 딸이다. 문제 될 게 전혀 없는 사랑이다.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연애하던 시절에 비하면 꽃을 사주는 횟수가 현격히 줄어든 와중에 정말 간만에 사 준 꽃이고, 딸에게는 처음 사 준 꽃이다. 이제 29개월이라는 인생을 살아온 딸은 처음으로 남자에게 꽃을 받아 본 경험이 됐다. 정말 간만에 사 줬음에도 아내는 아이처럼 좋아했고 꽃이라는 걸 처음 받아 본 29개월 딸아이는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싫어하는 내색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내에게는 처음 본 거바라라는 꽃을, 딸에게는 장미를 선물했다.


 평소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 전환할 겸 꽃을 선물할 만큼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 아내와 결혼 5주년 기념일이었다. 5월 12일. 일주일 정도 전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5주년 결혼기념일 준비하라는 멋쩍으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은 무언의 압박을 받았고 그런 준비의 일환으로 꽃을 선물했다. 기념일 당일엔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다음 날인 토요일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어떤 메뉴가 좋을까 하고 나름 머리를 굴렸는데 아내의 계획이 탁월해 아내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촌놈이 아내를 만나 덕분에 해외여행이란 걸 가게 됐다. 물론 첫 해외여행은 아니었지만 의미라는 측면에선 거의 첫 해외여행을 아내와 함께 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도 신혼여행을 말이다. 살면서 겁이 많아 해외여행을 엄두도 못 내 봤고 혹시라도 결혼을 한다면 제주도나 가면 됐지 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내 덕에 해외로 유럽으로 스페인으로 체코로 신혼여행을 갔다. 참 좋았던 여행이었다. 거의 첫 해외여행이었다는 점, 아내와 함께 간 신혼여행이었다는 점, 나름 막연한 동경의 여행지였던 유럽으로의 여행이었다는 점, 결과론적으로 상당히 탁월한 선택이었던 스페인과 체코라는 나라의 모든 것들이 좋았던 여행이었다.



 아내도 그 기억이 좋았는지 결혼기념일답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페인음식을 먹으러 가자는 거였다. 기념일을 준비하는 도중 나름 여러 가지 메뉴를 생각했는데 아내의 제안이 너무 좋아서 나도 흔쾌히 따르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의 노천식당에서 먹었던 먹물 빠에야, 상그리아, 보께리아 시장에서 먹었던 오징어 튀김 비슷한 안주와 맥주, 그리고 하몽과 맥주를 사들고 고성古城 여기저기를 돌며 마시고 먹었던 기억.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아내와 나 둘 모두가 상그리아나 맥주 혹은 와인을 마시려면 차를 끌고 갈 수 없다는 거였다. 대리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대리는 성격에 안 맞아 별로였다. 그렇다면 택시를 타면 되는 문제였는데 우린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도 정말 간만에 타 본 버스였고 아이는 에버랜드 셔틀버스 외에는 처음 타 본 버스였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는 것조차 나름 낭만적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30대 초반 백수 시절에 직업교육원 같은 데를 잠깐 다닌 적이 있다. 일을 하다가 일시적인 백수가 된 상황이라 차는 있었지만 교육원 인근에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백수주제에 기름 값이 웬 말인가 싶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았다. 시내버스를 주로 탄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노선이 단순해서 버스가 보통 이쪽 종점에서 저쪽 종점으로 가는 편도(?)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순환버스도 있고 환승도 있고 영 복잡해서 타기가 힘들었는데 아내가 이런 걸 잘해서 그냥 따라다녔다.



 차를 끌었다면 넉넉히 30분이면 도작할 거리였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환승도 하고 해서 한 50분 정도 걸려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가 저녁 첫 손님이었다. 메뉴를 보고 주문을 하는데 가격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았다. 결혼 5주년 기념일이고 다름 아닌 신혼여행의 기억을 되살려 스페인 음식을 먹으러 온 거니까 너무 재지 말고 시키자 해서 문어요리 하나, 먹물 빠에야 하나, 맥주 한 잔, 상그리아 한 잔을 시켰다.



 컥... 양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 가격이면 조금 더 푸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요리방식이 스페인식인 거지 재료가 스페인산도 아닐 텐데... 설령 스페인산이라고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오지에서 재료를 가지고 오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 비해 양이 너무 적었다. 맥주와 상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김밥이 해외로 나가면 두 배, 세 배 비싸지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만 마음으로는 영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결혼기념일 아닌가? 그냥 맛있게 먹었다. 확실한 건 신혼여행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문어를 너무 잘 먹어서 그냥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아빠 다 된 거 같다. 혼자였다면 혼자 다 먹어도 부족할 양이었는데 아이가 문어를 잘 먹으니 적당히 먹고 마는 모습에 스스로 아빠가 돼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장시간의 비행을 버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다시 스페인을 가자는 이야기를 아내와 하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마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소 부족했는지 맥주를 하나 사서 들어왔다. 원래는 스페인 맥주를 사 오려고 했는데 마침 동네 마트에 없어서 한국인답게 카스를 사 들고 들어 왔다.



 대지(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대지라는 호칭을 쓴다. 꿀꿀 귀여운 그 돼지가 맞는데 그냥 대지라고 한다.)야, 고마워. 부족한 사람 만나 즐겁게 살아 줘서 고마워. 결혼할 때는 적잖이 돈도 벌었는데 갑자기 일이 하기 싫다며 글 쓰겠다고 몇 년 간 나대고 있는데 이해해 주고 오히려 응원해 줘서 고마워. 대지를 만나기 전 결혼이라는 걸 거의 포기했었고 내 삶에 있어서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결혼도 했고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도 매일 안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더 좋은 남편, 더 믿음직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해. 그나마 다행인 건 살아온 날보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점이야. 살아가는 순간순간 부족함을 채워가며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우리 사랑의 결실인 딸, 건강하고 예쁘게 잘 키우면서 살자. 고맙고 사...사...사라...ㅇ...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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