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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11. 2023

고종 황제의 후손인가?

 나는 윤尹가다. 고종의 후손일 수가 없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커피라고 하는 걸 처음 접한 건 대학생 시절이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도 어렴풋이 미팅이나 소개팅 등을 할 때 카페(지금의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커피전문점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카페. 그렇다고 소위 다방은 아니었다.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다방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고등학생이 절대 갈 수 없는 곳이었다.)에 가서 뭣도 모르면서 폼 잡는다고 시켜 먹은 비엔나커피가 공식적인 의미로 처음 접한 커피이긴 하다.



 여담이지만 오스트리아 비엔나, 그러니까 빈에 가면 비엔나커피라는 건 없다고 한다.(실제로 가 보진 못해서...) 굳이 비슷한 커피를 찾는다면 아인슈페너라는 게 있다. 단어가 어려운데 당연하게도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울 뿐이며 누구에 의해 처음 비엔나커피로 잘못 알려졌건 지금 나름 제대로(?) 표현한다고 일부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라고 쓰건 간에 이 커피는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진한 커피에 설탕이나 생크림 등을 곁들여 먹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대학생 시절엔 커피가 좋아서 커피를 접했느냐? 아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바를 시작한 곳이 카페였을 뿐이다. 군대 전역을 하고 1년 정도 복학을 기다리던 시기 여름에 자수성가한 느낌의 여사장님이 이제 막 차린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는 군대를 가기 전에 노래방 알바가 전부였으니 카페 알바는 처음이었다.



 기존에 해 봤던 노래방 그리고 많은 대학생들이 알바로 일하는 술집 등등. 나름 선택지가 많았는데 커피를 딱히 좋아하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굳이 카페를 택한 이유는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진상 손님들의 출몰이 덜 할 것 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격한 표현을 조금 쓰자.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넘의 가게에서 술 처마시고 오리도 아닌 것들이 꽥꽥 거리며 소리 지르고 하는 꼬라지는 영 보기가 싫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카페 알바는 3개월을 채우고 그만두게 됐다. 카페가 안 돼도 너무 안 됐다. 소위 장사가 잘 되는 목 등을 전혀 모르는 어린 대학생이었던 내가 봐도 그 카페의 위치는 너무 안 좋았다. 사장님은 버티다 우선 혼자 해 보겠다고 오히려 미안해하시면서 말씀을 하시기에 아닙니다, 안 그래도 저 역시 말씀을 드려야 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하면서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만두게 됐다.



 카페, 커피와의 연은 그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그해 겨울 밤새 친구들과 놀고 아침 7시경에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제 복학이 얼마 안 남았는데 등록금은 몰라도 용돈 벌이는 조금 해야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을 문득 했다. 마침 대학가를 걸어가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카페 알바를 구한다는 형광용지가 눈에 걸렸다.(지금은 알바를 천국이나 몬을 보고 구하지만 당시엔 알바를 구한다는 용지를 가게 앞에 붙이곤 했다.)



 여기다. 하지만 졸리다. 밤을 샜으니... 지금 문을 두드린다고 열어 줄 시간도 아니다. 용지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외우고 집에 들어가 퍼지게 잔 뒤에 일어나 전화를 해 면접 비스무리한 걸 보고 알바를 시작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청주는 고사하고 광역시인 대전조차도 스타벅스가 없던 시절, 다시 말해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흔해빠진 커피전문점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참 흔치 않게 에스프레소 머신을 쓰는 카페였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때 보통의 카페는 아직도 물이나 우유를 가스레인지로 끓이던 시절이었다.



 머신이 참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본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인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꼭 알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 하라는 대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카페에서 대학교 2학년 복학을 앞둔 겨울부터 졸업을 하기 직전까지 알바를 계속했다. 4학년 때는 알바지만 그 카페의 매니저 정도의 위치에 올라 일을 하겠다고 들어오는 모든 알바를 다 가르쳤다.



 내 의지박약의 결과지만 마음에 맞지 않는 대학의 과에 졸업장이나 따자 하는 마음으로 다니는 와중에 카페 일, 그러니까 커피에 점점 매료됐던 거 같다. 졸업을 앞둔 시점, 어라? 커피라는 걸 업業으로 삼아도 괜찮겠는데 싶었다. 제대로 배워 보고 싶음 마음에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스타벅스에 가는 게 최고인 줄 알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손을 벌릴 곳은 역시 가난하지만 부모인 엄마밖에 없었다.     



“엄마, 나 500만 원만 빌려 줘.”

“갑자기 500만 원은 왜?”

“아니, 커피를 조금 배워 보고 싶은데 일을 하면서 배울 거거든. 그러려면 서울에 있는 스타벅스라는 곳을 가야 될 거 같아. 그래서 1년 정도만 고시원에서 버티면서 배우게 500만 원만 빌려 줘. 갚을 게.”

“뭐! 커피? 미쳤어? 내가 너 무슨 다방레지도 아니고 커피나 타라고 대학교까지 공부시킨 줄 알아. 이게 뭐에 미친 건지. 홀린 건지. 정신 차려! 그리고 돈 없어.”

“아 쫌 빌려 달라고, 갚는 다잖아.”



 더 이상 자세한 대화 내용은 생략하겠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지만 상당히 험해질 수 있고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그만 옮기도록 하겠다. 지금은 바리스타라는 직업의 이름이 있지만 바리스타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의 어쩌면 일반적인 부모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의지박약은 강력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커피를 접고 일반적인 직장에 취직했다.



 정말 커피와의 연은 끝인 줄 알았다. 첫 직장은 너무 힘들어 7개월 여 만에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은 그래도 할만했는지 4년 조금 넘게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일을 그렇게 잘하지 못해 있는 자존감, 없는 자존감 다 갈아 마시고 백수가 됐다. 30대 초반이었다. 무엇을 해야 되나? 무엇을 할 수는 있나? 하는 고민이 앞섰지만 그보다 앞선 감정은 일단 조금 쉬자였다. 놀았다. 백수답게 놀았다. 가지고 있는 차를 끌고 PC방으로 출퇴근했다.



 6개월 정도 놀다 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야~ 이거 이러다 루저 loser, 잉여인간 되기 딱 좋겠는데 싶었다. 잘 나진 못했지만 남아도는 쓸모없는 언제 없어져도 모를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뭐 하지? 지잡대 출신에 이렇다 할 기술도 없는데... 번쩍! 그래, 커피 하자! 대학교 졸업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가 사는 지역인 청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커피전문점 붐 boom이 일던 시절이었다. 가면 좋겠지만 굳이 500만 원을 들고 서울에 갈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알바 자리를 찾아야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천국이나 몬에서 알바를 찾았다. 검색을 통해 여기저기 기대를 품고 이력서를 넣었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이가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카페에서 일을 하는 직원 혹은 알바의 평균적인 연령대는 20대 초 중반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이 많은 곳이다. 그런 공간에 시커먼 30대 아저씨가 들어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심히 검색해서 지원했지만 그리고 고맙게도 몇몇 곳은 면접을 봤지만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포기해야 되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백수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은 많아서 오만 잡생각을 하며 그야말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영화를 보며) 시간을 청춘을 잡아먹고 있었다.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카페 일 해 보겠냐고. 어? 연락이 올게 아닌데 왔네 싶었다. 천국이나 몬에 이력서를 올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계속해서 일정 행위를 통해 이력서를 업데이트해 주지 않으면 뒤로 밀리게 돼 있다. 일정한 검색어를 통해 일부러 검색하지 않으면 보통은 뒤로 밀린 이력서를 사용자인 사장님들이 보기 쉽진 않다.



 알고 보니 당시의 사장님이 원하는 알바는 이랬다. 우선 카페가 외진 곳에 있어 차가 있어야 했다. 역시 같은 이유로 여자보단 남자 알바가 필요했다. 끝나는 시간이 그리 늦지는 않았지만 외진 곳이다 보니 여자는 다소 위험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카페보다 더 큰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고 카페는 소일거리 삼아 해 보고 싶었는데 믿고 맡길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마 사장님도 내가 일반적인 카페의 알바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만큼 원하는 알바를 찾기 힘들었을 건데 공교롭게도 접점이 생긴 것이다.



 믿고 맡긴 다는데, 카페 끝나는 시간도 그리 늦지 않은데 손님도 많지는 않을 거니 남는 시간에 커피 공부나 하라고 하니 이거 뭐 엎드려 절을 하며 감사합니다(마음이 그랬다는 거다.)하고 알바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 해당 카페와 또 하나의 카페 그리고 커피 학원에서 강사 생활까지 근 4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커피와 함께 했다.



 커피 일을 더 하고 싶었지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역시 다시 한번 박약한 의지를 확인하며 조금 더 돈이 되는 현실적인 일을 택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 덕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글도 쓰고 있다. 대학교 3년, 백수 이후에 4년. 7년이란 시간을 커피를 적당히 즐긴 게 아니라 업으로 삼아 왔다. 사회생활을 성년인 20살 이후로 본다면 지금 만으로 43살이니 23년 중에 7년, 조금 보태면 3분의 1이란 시간 동안 내 삶엔 커피가 있었다.



 커피는 삶의 일부였고 꿈이었다. 바람이었고 기대였다. 막연하지만 괜찮은 나만의 카페를 차리고자 하는 마음 혹은 계획의 원동력이었다. 다만 현장에 오래 있다 보니 카페라는 공간이 겉으론 음악이나 듣고 커피 향이나 맡으며 고고한 학처럼 커피나 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선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발을 구르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박약한 의지를 가진 놈이다 보니 쉬이 카페를 해 보겠다 하는 결정을 못하는 아쉬움 또는 안타까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음 한 구석엔 나만의 카페라는 꿈의 공간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있어 커피는 생명수다. 안 그래도 카페에서 오래 일을 한 경력에 의해 카페인은 이미 내 잠을 쫓을 수 없는 지경인 데다 글을 쓰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 지 오래다. 꼭 마시지 않는다 해도 커피는 옆에 있어야 한다. 향이라도 맡아야 한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커피 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당연히 커피를 싫어하지도 않고 커피 향은 사랑해 죽는다. 드립을 위해 원두를 갈고 물을 붓는 그 순간의 커피 향은 천만금을 주면 바꾸긴 할 텐데 여하튼 상당히 좋다.



 이쯤 되면 내 혈관에 커피가 흐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지금 일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게 글이다. 재능이 없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열심히 글을 쓰는 건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소가 밭을 잘 갈기 위한 에너지를 좋은 사료로 보충해 주듯이 나에게 있어 커피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에너지의 원천인 사료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커피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의 꿈이고 바람이고 기대였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나의 꿈이고 바람이고 기대인 글이 있다. 이 둘의 조화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같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무조건 적으로 같이 가야 된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나는 윤尹가지만 커피를 좋아했던 이李가인 고종 황제의 후손이 아닌 가?



 더 이상 글이 안 써져 커피 잔을 보니 커피가 없다. 사료를 채워야겠다.


https://groro.co.kr/story/3717     

그로로 동시 게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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