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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29. 2023

여름은 수박, 수박은 재즈

 보통은 오후에 일을 시작하지만 오늘은 오전에 업무 관련 일정이 있는 날이다. 정확히는 아침부터 오후 3시 정도에 끝나는 일정이다. 평소라면 이런 날은 상당히 피곤하다. 보통은 없는 오전에서부터 오후로 이어지는 일정을 마치고 바로 본래 업무를 시작하게 되면 거의 12시간을 넘게 일하게 된다. 다행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오늘은 마침 오후의 본래 업무가 없는 날이다. 예상대로 오후 3시 정도에 끝나고 기절하듯이 낮잠을 잤다. 아이의 낮잠 시간이 보통 오후 2시에서 3~4시 사이인데 끝나고 보니 아직 자고 있어서 나도 바로 잤다. 아니 기절했다.



 낮잠에서 깬 아이가 여지없이 깨우러 왔다. 낮잠인데 밤잠처럼 푹 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아이에 이어 아내도 왔다. 오늘 저녁에 뭐 할 거냐고? 얼마 전부터 예고된 상황이라 어딜 갈까? 뭘 할까? 고민했지만 그런 고민은 늘 힘든 거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밖은 장마로 비가 한참 내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봐 둔 대형 카페가 있어 거기나 가 볼까 했는데 비가 생각보다 많이 왔다. 비가 오는 건 괜찮은데 나다니기는 참 귀찮다. 적당한 비가 내리고 혼자 움직이는 거라면 귀찮아서 우산도 안 쓰고 대충 다닐 수 있는데 어린아이와 함께 그렇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가려면 나갈 수 있었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면서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대형 카페가 발이 달려 어딜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그냥 집에서 빗소리 들으며 편하게 저녁이나 먹기로 했다. 아이는 고기와 브로콜리 그리고 떡을 넣은 간간한 우유 떡볶이를 해 주고 아내와 나는 남아 있는 돈가스를 에어프라이어로 돌려 고추튀김, 멸치볶음과 함께 먹었다. 돈가스를 찍어 먹으려고 케첩과 마요네즈를 준비했는데 고추튀김도 튀김이니까 찍어 먹으면 맛있겠지 하고 찍어 먹었는데 역시! 맛있었다.



 다 먹고 나서 얼마 전에 장모님이 사다 주신 수박을 쪼갰다. 지난 일요일에 온 수박인데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아마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면 오늘도 수박은 냉장고에서 이 양반들은 나를 안 쪼개 먹으려나 하고 있다면 손가락을 역시 가능하다면 책상에 톡톡 두드리고 있었을 것이다.(쪼개지길 바라는 수박이라니...)



 먹기 편하게 껍데기는 잘라내고 대충 서걱서걱 썰어 이렇다 할 접시도 내지 않고 점심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해 놓은 대접에 대충 담았다. 담아내는 용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빨갛고 시원한 물이 주룩주룩 흐르는 시원한 수박이면 그만이다. 마침 라디오에서 재즈가 흘러나왔다. 크~ 비가 오는 저녁, 가족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는데 재즈라니... 분위기를 잡아 주는 비지만 나가려면 영 성가신 비 덕분에 나가지 않았고 또 그 비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살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눈을 감고 푼수를 떨었다. ‘나는 갓등으로 테이블 위만 비추는 그런 술집에 있어. 무대엔 인생 한恨이 많은 것 같은 보컬이 재즈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과 조금은 탁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술집엔 담배 연기도 조금 자욱해 줘야 분위기가 살아.’ 아내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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