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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Aug 23. 2023

사랑이 꽃 피는 여름

 https://groro.co.kr/story/5143



 나는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우선 어떠한 여행지라 해도 실제로 가서 보면 알려진 유명세와 달리 보통 그냥 그랬다. 큰 감흥이 오질 않았다. 바다에 가면 바다를 볼 뿐이고 산에 가면 산이 있을 뿐이었다. 알려진 유명세에 상응하는 감흥이 오지 않아 여행지에 가면 갈수록 오히려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져 갔다.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지에 가서 그런 감정을 느낄 거라면 굳이 갈 이유가 없었기에 애초에 자주 가지도 않는 여행을 점점 더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2016년 여름은 조금 달랐다. 늘 그래왔듯이 7말 8초라는 휴가철이 다가왔다. 이전 같으면 아마도 집에서 적당히 뒹굴 거리며 영화나 보고 맥주나 마시면서 게임할 궁리나 했을 것이다. 그러다 막바지에 여름휴가인데 하는 아쉬움으로 차나 끌고 나가 소위 드라이브를 한 두어 번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은 휴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마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휴가 계획이었을 것이다.



 5일 정도의 휴가 계획이었다. 전국에서 나름 유명하다고 하는 곳을 매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운전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청주라고 하는 지역, 대한민국의 정중앙은 아니지만 적당히 중간 즈음에 걸쳐 있는 도시에 사는 것도 한몫했다.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지역 중에 하나인 부산이 넉넉잡아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다시 말해 웬만한 지역은 3시간 안쪽으로 갈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배나 비행기를 타야 되는 제주도를 위시한 섬은 제외하고 말이다.



 계획 중간엔 청주에서 하루 정도 여유 있게 쉬는 일정도 있었다. 다녀온 곳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은 강원도 강릉과 남해 보리암이었다. 어딜 가든 몇 시간 안에 도착하겠다는 마음으로 때려 밟지 않고 천천히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피곤하면 들릴 수 있는 휴게소는 다 들러 가며 가면 시간은 조금 걸릴 수 있지만 크게 피곤하지 않게 얼마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강원도 강릉엔 많지는 않지만 지금은 전국적인 프랜차이즈가 된 카페에 가서 케이크와 커피를 마셨고 짬뽕순두부라는 걸 먹기 위해 아마도 내 인생 처음으로 웨이팅이라는 것도 해 봤다. 날도 더운 여름이었는데 뜨거운 국물 음식을 먹겠다고 웨이팅이라니... 뭐에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페의 커피와 케이크도 맛있었고 특히 웨이팅을 한 짬뽕순두부도 괜찮았다. 요즘도 그때의 짬뽕순두부가 가끔 생각날 정도다.



 지금 같으면 한 여름에 넣을 일정은 아니지만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찾았는지 남해 보리암이라는 곳을 갔다. 남해는 이전에 커피 일을 할 때 매장 관리차원에서 은근히 자주 갔던 곳이라 다소 멀지만 낯선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보리암으로 연결이 됐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여하튼 역시 참 덥고도 더운 날 3시간 넘게 차를 끌고 달려가 헉헉 거리며 보리암에 올라갔다. 생각보다 높은 곳이라 다 올라가서 저 멀리 보이는 풍경과 은근히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긴 했던 거 같다.



 중간에 청주에서 하루 쉬는 날엔 여유 있게 만화방? 만화카페도 갔다. 그야말로 만화방 세대인데 어릴 적엔 가본 적 없는 만화방을 그때 처음 가본 거 같다. 여름답게 팥빙수도 사 먹었다. 당시엔 가본 적도 없는 유럽의 가정집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를 한 카페였는데 아쉽게 지금은 없어졌다. 저녁엔 무심천을 걸으며 장시간 운전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운전하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웬만한 거리는 별스럽지 않게 다녀오는 것과 물리적으로 몸에 피로가 쌓이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의식, 무의식 중에라도 피로를 풀어 줘야 했다.



 처음으로 여행 계획이라는 걸 그것도 5일 정도의 계획을 짜는 건 나에게 상당한 노력과 고통(?)을 수반했다. 물론 혼자 간 여행은 아니었다. 다른 글에서도 밝힌 적 있지만 혼자 뭘 하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거나 어색해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여름에 더워 죽겠는데 혼자 여기저기 차를 끌고 다닐 만큼 열정적인 성향의 사람도 아니다. 이럴 경우 누가 함께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다니겠지만 그게 아니면 굳이 어딜 갈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휴가라 해도...



 그런데 그랬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랬다. 더욱이 함께 여행을 다닌 상대와 아직은 동료인지 친구인지 연인인지 애매한 상황에서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열심히 계획을 짰지만 상대가 얼마든지 거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랬다.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아니면 감이 왔는지 실천에 옮겼고 다행히 성공(?)했다. 그때의 상대는 지금 내 딸의 엄마다.



 매해 그렇지만 이전의 여름보다도 더웠던 2016년 여름 내 마음이 더 뜨거웠던 거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그 더운 여름에 헉헉거리며 보리암을 올라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 생각해 보면 아내도 마음이 영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해 살면서 알게 된 건데 아내는 더위에 상당히 약한 사람이다. 사람의 몸이 녹았다 얼었다 할 수 있다면 아마 여름엔 다 녹아 없어질 것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 뜨거운 여름 그야말로 뙤약볕이 내리쬐는 보리암 올라가는 길을 별 말없이 올라갔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내와 여름에 늘 휴가를 갔다. 물론 여행 계획을 짜는 건 아내가 전담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아내를 꼬시기 위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행 계획이란 어마무시한 에너지를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여행 계획을 세울 힘이 없었다. 아내가 여행 계획을 짜면 난 전문 백패커와 셔틀이 된다. 내가 또 짐 하나는 깔끔하게 잘 싸고 정리도 잘하고 물건도 잘 잃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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