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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Oct 22. 2023

개혁(feat. 가지치기)

https://groro.co.kr/story/6171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나무를 한창 가지치기하고 있다. 겨울맞이를 하는 거 같은데 왜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겨울맞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스쳐 지나가는 가을 뒤에 겨울이 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 봤을 뿐이다. 잎이 다 떨어지는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왜 가지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모든 나무의 가지를 무서울 정도로 처내고 있다. 정확하게 확인해 본 바는 아니지만 근 1년 정도 자란 가지를 다 처내는 거 같았다.



 풍성하게 뻗은 가지와 나뭇잎들이 원래는 가발이었던 것처럼 벗어던져진 모습으로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다. 나무도 생명인데 아프겠지? 물론 필요에 의해 그러니까 보다 더 잘 자라기 위해 가지를 내주겠지만 아픈 건 어쩔 수 없을 거야. 혹시 나무가 움직일 수 있거나 말할 수 있다면 가지치기를 거부할까 아니면 받아들일까? 분명히 보다 건강하게 겨울을 나고 다음 해의 봄과 여름을 준비하는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과연 곱게 받아들일까?



 분명히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당장은 괜찮아, 안 죽어하면서 인스턴트 음식과 술 그리고 담배 등을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마음 또는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잘 잘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건강검진임을 알고 있음에도 미루는 인간의 마음과 비슷한 생각으로 도망가거나 미루지 않을까? 아마도 분명히 움직일 수 없으니 가만히 있는 것일 테다. 아니 가지는 그러니까 동물로 생각해 본다면 팔과 다리 같은 부분인데 움직일 수 있다면 잘라 내려고 하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다리가? 뿌리가 박혀 있어 움직이지 못하건 어쩌건 간에 결과적으로 나무는 개혁에 버금가는 가지치기를 매년 해 낸다.(당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이렇게 좋은 가을날 어찌 보면 잔인할 정도로 가지치기를 당하는 나무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잘 안 되고 있다. 혼자 몸이면 걱정이 덜 할 텐데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일이 잘 안 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감하게 하던 일을 잘라냈다.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젊을 때라 걱정이 덜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결정적으로 혼자였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거리낌 없이 그만뒀다. 30대 초반의 일이다.



 10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지금 당장의 상황과 마음이 불안했던 10년 전과 별반 다름없다는 점이 놀랍고 신기하고 결정적으로 불안했다.(나이를 헛 먹었...)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아이는 커 가고 보다 나은 멋있는 아빠로 보여야 되는데... 그전에 시간이 갈수록 아내에게도 더 괜찮은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되네 싶은 마음에 밤잠을 설칠 정도는 아니고 여하튼 상당한 신경이 쓰이고 있다.



 삶을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개혁을 해야 되는 상황에 거짓말 조금 보태 굵은 줄기만 두고 가지를 전부 처 버리는 나무를 보니 나무보다 못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개혁이란 단어의 한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가죽을 고친다는 뜻이다. 조금 더 격하게 이야기하면 가죽을 뜯어고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내 삶은 나무가 거의 온몸을 잘라내듯이 하는 가지치기처럼 가죽을 뜯어낼 수 있는 결정과 그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무섭다. 두렵고 무섭다. 핑계와 변명은 많다. ‘현실적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여러 좋은 핑계가 있고 나이가 많다는 그다음으로 좋은 변명이 있고 가족이 있어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다는 같잖은 합리화가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역설적이게도 역시 현실이 현실적으로다가 뒤를 후려치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나가서 가지치기한 나뭇가지라도 주워야 될 판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유명한 자기 계발식 표현에 힘입어 또 다른 기회를 어쩌면 대단한 기회를 동시에 엿보고 있기도 하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에 자꾸 눈이 간다. 필요하다면 당면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과연 팔을, 다리를 잘라낼 각오가 돼 있을까? 풍성한 가을이라 달달한 가을바람만 불어올 줄 알았고 그렇게 되길 바랐는데 가을바람치곤 꽤 날카로운 바람이 몸을 스치며 생채기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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