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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Dec 01. 2023

드럽게 귀찮네

https://groro.co.kr/story/6941



 틔운을 이용해 라벤더를 발아시키고 어느 정도 싹이 올라오고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라벤더는 잘 자라줬다. 펠렛이 가지고 있는 영양분이 좋은 건지 틔운의 일정한 조명이 좋은 건지 여하튼 10개의 씨앗에서 나온 10개의 싹은 고르게 잘 자랐다.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조금 멀리서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이 없이 특정 개체가 특별히 웃자라거나 모자람 없이 보기 좋게 잘 자랐다.



 오히려 너무 잘 자라는 게 문제였다? 푸릇 파릇하게 잘 자라던 라벤더의 잎 끝이 점점 노란색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어? 식물을 잘 모르지만 라벤더는 아니 보통 그게 무어든 식물은 파릇파릇한 게 정상인데 노란색이 됐네, 심한 부분은 갈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고... 이거 이거 문제가 시작되고 있구만. 펠렛이 담아낼 수 있는 생명의 용량을 초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벤더의 뿌리가 펠렛을 감싸고 있는 얇은 종이인지 부직포인지 뭔지 모를 껍질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백번 양보해서 뿌리가 펠렛 껍질을 뚫고 나온 시점까진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뿌리는 모름지기 흙이라는 매질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데 펠렛을 뚫고 나온 뿌리는 뚫고 나갈 무언가가 없었다. 병아리는 첫 껍질인 달걀을 뚫으면 삶이 시작되지만 펠렛에 올려진 씨앗은 발아 후 펠렛을 감싼 껍질을 뚫어 버리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식집사라면 그전에 화분으로 옮겨 줄 거기 때문에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식집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보다 확고한 동기가 엮여 있지 않는 상황에선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미뤘다. 하루 이틀 늦는다고 죽겠어하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미뤘다. 미루고 미뤘다. 모든 라벤더들 잎의 반 이상이 노랗게 될 때까지 미뤘다.



 아주 약간의 변명을 해 보자면 미루는 시간 동안 그냥 미루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에서 화분으로 옮겨 주기 위해 나름 준비를 했다. 보다 미리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냥 그랬다. 우선 화분을 따로 사긴 조금 그래서 재활용을 한다는 좋은 허울을 앞세워 잘 먹는 요거트 통을 모으기 시작했다. 10개의 라벤더를 하나하나 따로 심으려면 10개의 통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해서 뜬금없이 카페에서 주는 투명한 테이크아웃 컵도 활용해 보고 싶어 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화분으로 옮겨심기를 미루기엔 아주 좋은 핑계였다.



 그리고 흙이 필요했다. 고맙지만 그로로에서 준 흙의 양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10개의 라벤더를 다 화분으로 옮기려면 추가적인 흙이 필요했다. 지난번에 다이소에서 10L 배양토를 샀던 기억이 있어 다이소에 갈 때마다 찾았다. 그런데 없었다. 그보다 작은 6L 정도 배양토만 있었다. 6L는 왠지 부족할 거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계속 10L 배양토를 기다렸다. 이후로 몇 번을 더 방문했지만 10L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문적인 화원에 가면 분명히 보다 저렴하게 많은 양의 배양토를 살 수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너무 많아 남을 배양토를 처치하기가 곤란해 머뭇거렸다.



 그렇게 기다렸다. 하지만 10L 배양토는 도무지 나오질 않았고 투명한 컵을 모으는 것도 일부러 카페를 찾지 않는 이상 쉽지 않았다. 요거트 통은 꾸준히 먹고 있어서 6개가 모였다. 그 와중에 라벤더는 ‘저 원래 노란색이었나 봐요.’하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는 듯했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 조금 더 머뭇거린다는 건 말려 죽이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식집사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도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결단이 선 날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 결단 하나만으로 충분히 밖에 나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렸다. 아... 이 게을러터지고 귀찮음에 매몰된 인간 같으니... 마침 아내가 나갈 일이 생겼다. 아주 당당하게 부탁을 했다. 죽어 가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부탁할 수 있었다. ‘들어오는 길에 흙 좀 사다 줘.’



 아내는 일을 보고 시즌에 맞게 크리스마스 용품 약간과 흙을 사다 줬다. 6L인 줄 알았는데 6.5L였다. 예상한 거보다 조금 더 많아 기분이가 좋아졌다. 정말 진짜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원래 목적은 요거트 통과 카페 테이크 아웃 컵 등해서 10개의 재활용 화분에 10개의 라벤더를 하나하나 옮겨 심는 거였는데 요거트 통 하나에 2개의 라벤더를 옮기기로 했다.



 칼로 통을 슥슥 자르고 바닥에 물구멍을 뚫었다. 배양토를 담고 라벤더들을 옮겼다. 배양토로 위를 살살 덮고 그로로에서 준 상토로 마무리했다. 영양제도 골고루 나눠 뿌려 줬다. 그로로에서 난석이라는 것도 줬는데 난석이니까 돌이겠지 뭐, 위에 보기 좋게 올리는 건가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뜯어 올리려 하는데 어! 예상과 다르게 누런 색 돌이었다.



 위에 올리는 건 하얀색 돌 아닌가? 아니 근데 난석이 뭐지, 돌이긴 한데 쓰임이 뭐지? 그제야 난석의 쓰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다 담은 배양토와 상토를 헤집을 순 없으니 그냥 원래 그런 목적이었던 것처럼 위에 올리자 하고 마무리했다. 이어서 신나게 물을 뿌려 줬다. 배양토가 조금 부족할 것 같아 다지듯이 채우질 못해 물을 벌컥벌컥 부어주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아 분무기로 신나게 뿌렸다.



 주변을 정리하고 줄을 맞춰 보니 나름 보기 괜찮았다. 요거트 통 하나에 2개의 라벤더를 고르게 잘 심고 죽 나열해 놓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 괜찮은 식집사가 뭔가 대단한 걸 한 거 같은 모양새를 보여 줬다. 쭈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아픈 허리가 끊어질 거 같았다. 끊어질 거 같은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저녁을 먹었다. 일단 베란다에 뒀는데 겨울을 향해가는 시기가 문제였다.



 밤 12시 정도에 베란다의 온도를 재어 봤는데 13도 정도였다. 찾아보니 라벤더는 20도 내외에서 자라는 걸로 나와 있었다. 아... 이거 펠렛을 뚫고 나온 뿌리가 죽을 거 같다고 미루고 미루다 화분으로 옮겼는데 이렇게 베란다에 두면 그냥 죽겠는데... 차라리 그냥 뒀으면 따뜻한 방에서 죽는 건데 이렇게 되면 적극적으로 죽이는 거잖아 싶은 생각에 베란다보다 따뜻한 집 안으로 화분을 옮겼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화장실로 옮겼다. 그래, 됐다! 밤엔 화장실에 두고 낮엔 베란다에 두자. 아 하하하하하하, 난 완벽한 식집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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