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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l 13. 2021

살아 있다.

 살아야 산다. 영화 대사 중에 하나다. [서부전선]이라는 우리 코미디 영화에서 배우 설경구의 극 중 인물 대사다. “살아야 산다.” 그리고 우리 좀비 영화 두 편을 봤다. [반도]와 [살아있다]였다. 보기 전엔 반도라는 영화를 더 기대했으나, 두 편을 다 보고 난 뒤엔 [살아있다]가 조금 더 재미있었다.     

 


 [살아있다] 란 영화에도 살아야 한다는 아니 보다 더 의지가 담긴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살아남아야 한다.” 아니 그전에 영화 제목 자체가 [살아있다]이다. 물론 영화 속에선 좀비에 대항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말 원초적인 삶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를 우리 삶 속에 충분히 투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좀비로부터가 아니라 삶 자체로부터 살아남아야 살아진다. 농담처럼 이야기를 한다. 너무 애쓰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봐라! 길바닥에 쓰러진 노숙자도 ‘살아는’ 있다. 노숙자를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일반적인 관점을 이야기할 뿐이다. 살아진다고 노숙자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건 사는 게 아니니까.     

 


 목숨이니까, 내가 스스로 의지를 갖고 끊어 내기 전엔 살아지는 게 목숨이니까, 그만큼 질긴 게 목숨이니까, 살아는 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수동적으로(노숙자가 되고 싶어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노숙자들이 수동적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살아지는 것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능동적으로 조금 더 잘 살아 보기 위해 애를 쓴다.     

 


 이를 간단하고도 거칠게 표현하면 결국 다른 이들과 경쟁이 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면 나 자신과의 경쟁이겠지만, 우선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매 순간이 경쟁이다. 매 순간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누구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고, 누구보다도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고,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선택을 그리고 경쟁을 우린 매일 아니 매 순간 하고 있다. 삶을 너무 팍팍하게 보는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래 맞다. 팍팍하게 보고 있다. 하지만 내 말이 어디 틀렸는가?  


 물론 틀렸을 수도 있다. 아니 틀렸다. 모든 사람이 삶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선택으로 바라보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선택을 바탕으로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소유라는 부분을 고민한 적이 있다. 특별히 한 종교를 믿진 않지만 불교계에선 무소유를 설파한다. 소유, 욕심 그래 욕심이 문제다. 욕심으로 인해 결국 번뇌하는 것일 테니…. 하지만 소유하고 싶은 마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욕심이 문제인가?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과하지 않다면 그게 그리 문제인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유욕이 과하니까, 무소유를 설파하고 문제라 하겠지만 과하다면 또 얼마나 과하다고 하는 것인가? 그저 편안히 잘 수 있는 집 한 채, 편안히 움직일 수 있는 차 한 대, 이 정도 아니겠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다 큰 집과 차를 원하는 마음의 끝이 없기에 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금수저로 태어나 재산을 물려받거나, 로또가 되거나, 큰 사업을 일으켜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니까 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이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해 빼앗아 오지 않는다면 이런 소유욕이 도대체 왜 문제란 말인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결정적으로 재화는 한정적이니 더더욱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화는 거의 끝이 없는 것 같다. 부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도처에 깔려 있는 듯한데, 왜 도대체 왜? 모든 사람들의 소유욕을 충족시켜 주지 않느냐 말이다.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되묻고 싶고 답답하다. 답이 있는 뻔한 질문에 너무 답답해 반기를 들고, 스스로 되물으려니 말이 안 된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살아야 사는데,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냥 살아지고 싶진 않다.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여기서 보다 낫다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삶을 살 수 있는 건지 제발, 제발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아니 나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스스로 찾아내야 온전히 내 것이 될 테니….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본 영화 제목처럼 아직은 분명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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