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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l 12. 2021

죽음과의 동거

 20여 년 전에 개봉한 ‘파이트 클럽’이라는 영화가 있다. 20여 년이란 긴 시간 속에 서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최근에야 만난 영화다.     

 


 주인공은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면증은 ‘reset’이 없는 삶 속으로 집어던져 버린다. 잠을 통해 새로운 다음 날을 시작해야 하는데, 매일의 새로움을 강탈당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너무 고통스러워 병원엘 찾아간다. 잠을 잘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한다. 의사는 들은 체 만 체하다, 야채 더 많이 먹고 운동을 조금 더 하라는 교과서적인 처방이 아닌 조언만 하고 자리를 뜨려 한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고통이 극심해 죽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리를 뜨려던 의사가 매주 화요일에 ‘고환암 환자’ 모임이 있는데 한 번 나가보고 고통을 이야기하라면서 훈계 섞인 핀잔을 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환암 환자는 아니지만 모임에 나가 봤다. 그리고 생각을 했다. 남자에게 고환암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남성성의 완벽한 상실이다. 신체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고통이다. 모임에서 환자들은 각자의 고통을 솔직하게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주인공은 환자는 아니지만, 척하며 다른 환자와 짝이 돼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포옹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대는 암을 앓기 이전에 보디빌더였다. 그런 그가 고환암을 앓고 호르몬 불균형으로 가슴이 비대해졌다. 세상은 참 악랄한 것 같다. 그런 그와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포옹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이후로 불면증은 사라졌다. 고환암을 앓고, 남성성을 잃은 남자들의 고통을 본 뒤로 스스로의 삶에 고통이 다소 축소됐으리라. 그 이후로도 다양한 암 환자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모임에 척하며 참여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진솔함과 포용력에 그만 중독되고 만 것이다.     

 


 이후로 영화는 조금 다른 결로 전개가 된다. 영화의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지만 그 속에서 고통과 죽음 앞에 진솔해지는 사람의 모습에 집중하게 됐다. 살아가면서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우린 정말 많은 거짓을 일삼게 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써 가며 거짓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물론 솔직함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평생을 살아가며 하는 거짓말에 의한 업業은 조금씩 쌓이게 마련이다. 살아가는 시간이 근 백 년인데 쌓이는 업業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진솔해지는 것 같다. 삶 속엔 ‘태어남’도 있고, ‘죽음’도 있다. 태어남이 시작을 알리는 삶의 일부라면, 죽음은 마무리로써 삶의 일부다. 중요함의 경중을 따지기 어려운 대상이다.     

 


 하지만 태어남은 언제나 항상 축복의 대상이요, 죽음은 그 반대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의 삶도 시작과 끝이라는 영속성의 단절에 의해 주어진 한 번의 기회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영속성의 단절은 시작이 아니라 끝이 주는 것이다. 즉, 태어남이 아니라 죽음이 주는 영속성의 단절에 의해 우린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태어남이 주는 축복(?)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 죽음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인데 바로 ‘두려움’이다. 죽음 이후를 우리는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실재하고, 믿고 아니고를 떠나서 확실히 경험해 봤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두려움은 크다. 더해서 살아가며 쌓아 온 거짓의 업業에 의해 그 두려움은 가중된다.     

 


 전해 내려오는 일반적인 사후세계의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다. 누구도 명확히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전해 내려오는 집단적인 믿음은 사람이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쌓아 온 거짓의 업業이 크면 클수록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을 직면해야 하는 죽음을 삶의 일부가 아닌 다른 것처럼 외면하고 때로는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두려움을 직시直視한다면 오히려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 이 두려움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법은 죽음이 우리 삶의 일부라는 점을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평생을 외면하다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 늦었지만 진솔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그 시기를 앞당기면 그만인 문제다. 죽음을 앞당기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 삶의 일부라는 점을 태어나면서부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빨리 인식한다면 삶에서의 거짓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고, 거짓이 줄어드니 쌓이는 업業 또한 적어 죽음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도 농도가 옅어질 것이다.     

 


 우리가 예측 가능하고,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 봐야 과거인 어제와 현재인 오늘 그리고 미래인 내일 정도뿐이다. 어제의 삶을 바탕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대하지만 당장 내일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이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주변을 속인다. 그 업業을 어찌 감당하려는지 모를 일이다. 오늘 하루를 마치고 잠을 자다가도 죽을 수 있다. 내일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죽을 수도 있다. 즉, 죽음은 우리 옆에 함께 한다는 정도만 언제나 항상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순간을 진솔하게 살아 낸다면 명확하지도 않은 죽음 뒤의 두려움 따위는 삶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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