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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13. 2024

바질은 콩나물

https://groro.co.kr/story/10570



 식목일에 맞춰 아이 유치원에서 바질을 키워 달라고 바질 키우기 키트를 보내왔다. 아주 간단한 키트였다. 작은 봉투에 모든 게 다 담겨 있었는데 봉투를 뜯으면 흙이 들어 있었고 동봉된 바질 씨앗을 봉투 안의 흙에 뿌리듯이 심어 놓고 자라는 걸 관찰하는 키트였다.


 처음엔 화분이나 다른 추가적인 무언 가가 필요할 줄 알고 미뤘다. 아빠가 나름 식집사 행세를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바질을 심는 건 내 몫이 됐다. 미루고 미루다 아내의 언제 해 줄 거냐는 잔소리 혹은 핀잔 중간 즈음의 타박을 듣고서야 알았다고 볼멘소리를 하며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뜯고 나서야 추가적인 화분 등이 필요 없고 봉투 자체에 담겨 있는 흙에 그저 씨앗만 뿌리면 되는 거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머쓱함을 가리기 위해 아하~ 이거 별거 아니었네 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씨앗을 심고 봉투에 아이 이름을 썼다.


 하루 이틀 지나니 웃기지도 않게 싹이 빼꼼하고 나왔다. 그게 어디든 머리만 붙이면 자는 내 모습과 흙만 있으면 땅이든 화분이든 봉투 안이든 싹을 틔우는 녀석들의 모습이 비슷해 웃음이 나왔다. 작은 봉투라 물을 잔뜩 줄 수는 없어 분무기와 그로로에서 준 스포이트를 이용해 살살 줬다.

 며칠이 더 지나니 나온 싹들 중에 하나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다 힘없이 말라비틀어져 갔다. 어!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아빠가 이래 봬도 식집사인데 바질 하나도 제대로 못 키워 주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남아 있는 바질 씨앗을 역시 그로로에서 받은 작은 화분에 다시 심었다.


 봉투에 아직 하나의 싹이 남아 있었고 화분에 다시 다른 씨앗을 심었으니 잘 비교해 가면서 관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봉투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싹까지 죽고 말았다... 식물을 수시로 죽이고 살리는 게 식집사라지만 마음이 별로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오히려 잘 됐다(?) 싶은 마음으로 화분에 심은 녀석들이 잘 자기를 바라는 마음에 집중했다. 봉투보다는 아무래도 화분이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을 줬다. 역시 며칠 뒤에 싹은 나왔고 이제 됐다 싶었다. 화분이니 잘 자라겠지 했다.


 웬 걸 싹이 죽지는 않는데 영 자라지는 못 했다.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이 바질 키우는 거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키우면서 잘 뜯어먹든 데... 뜯어먹는 건 고사하고 이거 왜 이리 안 자라지? 아니 왜 못 자라지? 경험이 많은 식집사가 아니라 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 화분이나 옮겨 주자. 화분이 작아서 그럴 거야 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생각에 그로로에서 받은 가장 큰 화분인 얼마 전까지 적환무가 자리했던 화분에 바질을 옮겨 심었다.(적환무는 화단으로) 그리고 작은 화분일 때는 북향인 베란다 쪽에 뒀다는 생각이 분갈이를 한 이후에 들었다. 아...

 분갈이를 마치고 화분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이렇다 할 구조물이 없어 그냥 뙤약볕이다. 인공조명도 아니고 창문을 통한 햇빛도 아닌 그야말로 직사광선을 마음껏 쬘 수 있는 공간이다. 매일 아침 혹은 늦은 오후에 물을 줬다. 화분이 커서 그런 건지 햇빛을 잘 받아서 그런 건지(아마도 후자) 매일매일 이전과는 다르게 성장하는 속도를 바질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에게도 보여 줬다. 식목일에 처음 집에 왔을 때 유치원에서 잘 자란 모습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찍어 보냈다. 선생님의 바질이 잘 자랐네요 하는 칭찬을 들으며 기분이가 좋아졌다. 이게 아이 숙제였는데 아이는 아빠가 처음 봉투에 씨앗을 심을 때와 봉투에 싹이 나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잘 자란 모습만 쓱 한 번 본 게 전부다.

 뭐 여하튼 아이는 충분히 봤을 것이다. 숙제 아닌 숙제는 끝났고 바질은 계속 자랐다. 잎이 여느 식집사들이 보여 준 바질의 잎과 비슷한 크기로 자란 걸 확인할 즈음 아내가 잎 좀 뜯어 오라고 했다. 아침에 아이 또르띠야 해 줄 건데 바질 넣을 거라고 해서 눈곱 낀 눈을 비비며 옥상에 올라가 잎을 떼 오려다 아이와 아내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화분 채 들고 내려와 가장 큰 녀석의 잎을 일곱 장정도 뗀 거 같다.

 아이는 맛있게 잘 먹었고 예전에 할머니들 그리고 엄마들이 이런 맛에 콩나물을 그렇게 키워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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