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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듄 1권에 나오는 베네 게세리트의 의식에 나오는 ‘공포에 대항하는 기도문’
‘듄Dune’이라는 영화가 있다. 최근에 2편까지 나온 영화다. 3편도 나올 예정이다. 원작 소설이 처음 나온 건 1960년대다. 당시엔 18권으로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근 2년이 지난 거 같다.) 6권으로 합본돼 양장으로 다시 나왔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일단 영화부터 봤다. 1편을 보고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원작이 있다는 걸 알게 돼 읽어 보려는 데 마침 새롭게 합본돼 깔끔하게 양장으로 나왔다고 해 도서관에서 기분 좋은 새 책 냄새 폴폴 나는 책을 빌려 봤다.
6권 도합 4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 다 읽는데 한 달 반 정도가 걸렸다. 그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달 만에 읽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려면 하루에 최소한 150페이지 정도는 읽어야 했다. 이해가 잘 됐으면 어렵지 않았을 거 같은데 이해가 잘 안 됐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심오하기도 하고 여하튼 영화로 보면 별 내용 아닌데 원작으로 보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이다. 도대체 왜 한 달 만에 다 읽으려 했는지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결국 한 달을 넘어 한 달 보름 만에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끔찍한 기억이다. 읽다가 졸려서 서서 읽기도 하고 정말 오만 짓을 해 가며 읽었다.
내용 중에 ‘베네 게세리트’라는 집단이 나온다. 무녀, 무당, 마녀, 점술사 등등등. 뭐라고 해도 맞을 거 같고 뭐라고 해도 정확하게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 그런 집단이었다. 한 편으론 종교 집단 같기도 하고 여하튼 설정 상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런 집단이었다. 그 집단의 기도문 중에 하나를 서두에 옮겼다. 기도문이라는 단어를 쓴 걸 보니 종교 집단이 맞는 거 같기도 한데 원작을 읽다 보면 또 딱히 그렇진 않다. 복잡 미묘한 집단이다.
더욱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거나 시간이 없다면 2편까지 나온 영화 보기를 추천한다. 책을 잘 읽는 분들은 어렵지 않게 원작을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다소 힘들 거 같거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영화를 보길 바란다. 원작 소설을 읽다 보면 상당히 진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영화도 충분히 그런 이미지를 부각하는 연출을 하지만 영화는 볼 만하다. 조금 심오한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SF라고 대충 후려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참고로 원작이 나온 지 꽤 됐기 때문에 최근에 나온 영화가 처음 영화는 아니다. 처음 영화는 1984년에 나온 영화니 잘 골라 보길 바란다. 참고로 최근에 나온 영화는 현재 퇴폐미의 최고봉인 ‘티모시 샬라메’가 주연이다.
영화 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하고 기도문이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을 때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원래 그렇게 두려움이 많았던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기억은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정이 되기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하튼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젊거나 어린 시절에는 무언가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할 때 많은 두려움이 앞서진 않았던 거 같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세상을 조금씩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정확하진 않지만 뭐 이런 표현도 있다. 마음속에 두려움이란 늑대를 키우다 보면 그 늑대가 결국 마음을 다 잡아먹을 거라고...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키우는 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그렇고. 말장난 같지만 두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키운다고 해야 되나? 나이가 드는 게 벼슬도 아니고 딱히 싫지도 않다. 즉, 나이 드는 자체는 괜찮다. 영생할 수 없는 사람이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며 늙어 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흰머리와 주름이 느는 것도 딱히 싫지 않다. 다만 면역력이 점점 떨어지는지 자질구레한 만성질환이 하나 둘 생기는 게 조금 짜증이 날 뿐이다.
두려움도 질병이라면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떨어져 생기는 만성질환 중에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질환이다. 그 정도가 정말 심각하다면 정신과라도 갈 텐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점점 커지는 늑대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최근에 그 두려움의 크기가, 두려움이라는 늑대가 아주 상당히 커져 있다. 이유는 일을 하는 곳을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4년 전에 일이 하기 싫어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글은 아직 제2의 인생이 되질 못하고 때려치우려 했던 일의 곁방살이에 만족하고 있다. 그 일을 당당하게 때려치우면 참 좋겠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일을 하는 공간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런데 또 그게 두렵다.
가장 좋은 핑계는 앞에서 이야기한 딱히 싫지 않은 상황인 나이가 들어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책임져야 할 것도 많이 생겼고 앞으로 그 책임은 더 커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무언가 바꾼다는 게 상당히 두려웠다. 그래서 근 1년을 질질 끌고 있다. 표면적으론 상황을 보고 보다 꼼꼼하게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렇게 보이려고 하지만) 사실 두려움이 가장 크다. 물론 자세하게 다 설명할 순 없지만 상황이 의도치 않게 꼬이고 밀린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요인은 두려움이다. 바꾸는 게 맞는 건가? 바꿀 수 있기는 있는 건가? 바꿨는데 나가리면 어쩌지? 아직 충분히 젊고 다른 기회도 분명히 있겠지만 20대 때보다는 더더, 30대 때보다는 더 불안하고 두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비단 나이뿐만 아니라 그때는 혼자였고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배가 되기도 했다. ‘남자가 말이야, 가장으로서...’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건 그거고 내가 사랑하는 처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은 남녀의 문제도 아니고 시대 변화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 혼자 있을 때보다 어깨에 올라타는 두려움이 큰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시점에 문득 2년 전에 읽은 소설의 기도문이 생각났다. 기억에 의하면 당시에 책을 읽으면서 저 기도문을 몇 번을 읽었던 거 같다. 눈으로 읽고 소리 내 읽고 단어 하나하나 씹어 먹듯이 읽었던 거 같다. 그만큼 두려움이 커서 꼭꼭 씹어 먹으면 두려움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좋은 약이라도 될 것처럼 그야말로 곱씹어 가며 읽은 거 같다.
한 편으로는 우리 영화 ‘최종병기 활’에 나오는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박해일 배우의 대사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기도문이다. 이 대사도 상당히 좋아하는 대사다. 이 대사 역시 틈만 나면 중얼거린다. 성경은 잘 모르지만 어느 책에서 우연히 본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장 34절’라는 구절도 생각이 난다.
사실 지금 옮겨서 일을 할 공간에 대한 결정이 어느 정도 선 상태다. 마지막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정리하고 잡아채느라 시간이 걸리는(정확히는 끌고) 중이다. 조만간 결정을 내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결정은 내렸다. 다만 ‘한 번 더, 조금 더’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쓸데없는 확인을 하는 중이다. 이런 쓸데없는 확인을 이 글을 쓰면서 베네 게세리트의 기도문을 읽고 박해일 배우가 멋지게 연기한 주인공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알지도 못하는 성경의 구절을 읊조리며 마지막으로 정리하려 한다.
그만 커져라.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늑대야. 내가 바로 ‘이야기하는 늑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