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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다. 마흔다섯 번째 생일이다. 대단한 날은 아니다. 기념일이라는 게 그게 마음을 먹으면 의미가 있지만 마음을 놓으면 그냥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나 온 생일을 한 번 돌아보자. 영유아기의 생일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시대상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홀랑 벗고 찍은 첫돌 사진에 의해 생일이라는 걸 기념했구나 정도로만 인식할 수 있다. 영유아기의 생일은 내 생일이 아니라 부모님의 그리고 어른들의 생일이었다.
10대의 생일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생일이라는 아주 좋은 구실로 치킨이나 짜장면을 먹는 날 정도였다. 생일이라서 아마도 케이크를 사서 노래도 부르고 촛불도 끄고 했을 텐데 생일 케이크가 맛있었다는 특별한 기억은 없다.
20대의 생일은 조금 달랐다. 10대의 생일은 아직 부모가 챙겨주는 부분이 컸던 반면에 20대의 생일은 보다 주도적으로 챙겨 먹었다. 10대 때와 같이 케이크나 치킨 그리고 짜장면 등을 챙겨 먹은 건 아니다. 이 부분도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술을 챙겨 마셨다. 혈기 왕성한 술을 이겨 보려고 했던 20대 때 아주 좋은 기념일이었다. 친구들도 다 부르고 선물은 됐고 거 하게 술 한 잔 마시면 그걸로 생일은 족했다.
30대의 생일은 또 달랐다. 달랐다기보다는 더 이상 기념하지 않았다. 기억이 없는 영유아기를 제외하고도 근 20여 년을 챙기다 보니 슬슬 그 의미가 퇴색됐다. 분명히 이 땅에 이 세상에 태어난 아주 소중한 날을 기념하는 그런 날인데 그래서 퇴색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됐다. 더 이상 생일이라고 누굴 불러 술을 마시지도 특별히 기념하지도 선물을 받지도 않았다. 아! 여러 대기업에서 챙겨주긴 했다. 문자로. 급기야는 대기업들이 같지도 않은 쿠폰이나 할인권 등을 미끼 삼아 축하 문자를 보내 줘야 아! 오늘 생일이구나 했다.
그렇게 삶 속에서 생일이 365일 중에 하루일 뿐 일 때 즈음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작은 선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맛있는 거 사 먹는 하루 정도로 족했다. 나는 술을 좋아해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아내가 술을 안 좋아해서 생일이라고 딱히 술을 마셨던 거 같지도 않다. 아니 애초에 연애하는 내내 술을 마시기 위한 소위 술집을 손에 꼽을 정도로 갔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생일은 계속 챙겼다. 연애할 때와 같이 작은 선물 혹은 마음껏 쓸 수 있는 일정 정도의 돈을 선물 대신 주고받으며 역시 맛있는 걸 사 먹는 날이었다. 연애할 때와 조금 달라진 점은 생일은 그래도 술 한 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라는 당위(?)를 내세워 술을 한 잔씩하고 있다. 좋다.
그렇게 생일을 마흔네 번 챙겨 왔다. 별스럽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마흔네 번이 모두 의미 있는 날이었다. 기억이 나건 그렇지 않건 선물을 많이 받았건 그렇지 못했건 술이 꼴아 꽐라가 났건 간에 여하튼 한 해 한 해 잘 살아왔다는 걸 확인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이제 마흔다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다. 난 1979년생이다. 주변사람들에게 농담처럼 격동의 70년대 그 끝에 태어난 그런 세대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갓 난 아기여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지만 역사로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다시 되풀이돼 버렸다. 되풀이 돼서는 안 되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역사에 남을 내일이 기대된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라 더 기대된다. 잘 살아왔건 못 살아왔건 간에 내 삶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역사 역시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알릴 수 있는 날이다. 그 새로운 시작을 그야말로 내 생일을 축하하듯이 축하하고 싶다. 지난주에 마음이 아픈 상태로 술을 많이 마셔 탈이 났다. 내일은 기꺼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술 한 잔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