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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Dec 15. 2024

맥주가 맛있어?

https://groro.co.kr/story/13065



 세 가족이 모두 모여 일요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진파게티(진라면과 짜파게티) 그리고 에어프라이어에 익힌 닭봉을 뜯어먹었다. 더불어 반주 혹은 음료수 느낌으로 맥주도 한 캔 마시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해 준 피자를 먹었다. 48개월을 일주일 앞두고 있는 딸이 문득 물어봤다.

‘아빠, 맥주가 맛있어?’

‘어, 음... 그게 맛이 있는 건 아닌데 맛이 없는 것도 아닌 뭐랄까 애매해.’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알아듣는 건지 어쩌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마저 피자를 먹었다. 나 역시 아이가 이해를 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맥주 한 모금을 마저 마셨다. 시원하긴 했는데 썼다.



 맥주가, 술이 맛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동시에 내 삶 속에서 마셨던 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처음 술을 마셨던 때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미성년자로 마시면 안 되지만 마셨다. 지금과 다르게 그때는 인문계(현재는 표현을 일반계로 바꿨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대학교를 가기 위한 수능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시험의 수준과 부담감은 수능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여하튼 시험성적이 나쁘면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갈 수 없는 시험이었다. 해서 시험을 백일 앞두고 많은 중학생들이 ‘백일주’라는 이름으로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오히려 지금은 다른 분야에서 어린 친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면 이렇다 할 신분증 검사 없이 누구에게라도 술이고 담배를 다 팔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3학년도 아니고 중학교 3학년들이 버젓이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친구들과 어디에서 술을 마실까 작당모의를 하다가 친구 놈 입을 통해 샌 건지 우리가 걸린 건지 모르겠지만 친구의 엄마에게 걸렸다. 그런데 그 친구의 엄마가 또 보통 분은 아니셨다. 크게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어디 엄한 데 가서 속 버리며 술 마시지 말라고 이왕 먹을 거 본인 집에 와서 먹으라고 맛있는 안주 해 준다고 해서 맛있는 안주까지 얻어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맥주가 맛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거의 처음 제대로 먹어 본 술이라 기본적으로 맛이 있고 없고를 논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주 강한 탄산음료 같은데 비릿한 보리맛과 쓴 맛이 전부였다. 사실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학생으로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 그 일탈의 짜릿함이 더 컸고 나름 이유가 있어서 마시는 거라는 이상한 합리화도 있었고 더불어 어른의 허락도 받은 자리라 묘하게 떨리면서 설레면서 재미있었던 기억만 난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고등학생이 되고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그 덕에 원하는 대학에 가지도 못 했다. 그렇다고 술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원망스러웠을 뿐인데 그마저도 시간이 많이 흘러 그냥 뭐 그런 거지 이렇게 정리한 거 같다. 여하튼 고등학교 시절과 20대 때는 주로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맥주보다 맛있어서 마신 건 아니다. 맥주보다 가성비가 좋았다. 비슷한 가격에 조금 더 빠르게 취할 수 있었다. 돈이 늘 부족한 고등학교 그리고 20대 시절에 같은 돈을 내고 보다 빨리 취할 수 있는 소주를 선택하는 건 너무 당연했다.



 역시 술의 맛을 논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야말로 취하기 위해 마신 술이기 때문에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주가 더 중요했다. 이러나저러나 술을 마시면 속을 버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빈속에 마시는 건 최악이라 다음에 마실 술을 위해서라도 속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역할을 안주가 해 줬고 무엇보다도 맛있었다. 술집에서 파는 안주들이 보통은 짜고 달고 매웠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맛있었다. 해서 20대 끄트머리까지는 순수한 술맛 따위는 논할 여지도 필요도 없었다.



 30대라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소주보단 가볍게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됐고 또 마침 시기적으로 수입맥주가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31가지 아이스크림 중에 뭘 먹을까 고민하듯이 마트에 가서 어떤 나라의 어떤 맥주를 마셔 볼까 하고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마 거의 처음으로 술맛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정해진 가격에 살 수 있는 캔 맥주의 개수가 정해져 있어 최대한 맛있는 걸 고르기 위해 성분을 읽고 인터넷을 찾아보며 마트의 맥주 코너에 들어서면 한참을 서성였다.



 그렇게 40대로 접어들었고 결혼 후에도 아내와 같이 마트에 가면 맥주 코너에서 가장 신중해졌다. 그런데 이마저도 최근엔 다시 가성비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고르고 골라 마셔본 결과 분명히 좋아하는 특정 맥주가 생겼지만 한 캔을 넘어서면 맛의 한계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딱 한 캔까지는 정말 맛있고 시원하게 목으로 넘어가는데 그다음부턴 그저 알콜이 들어간 쓴 탄산음료에 지나지 않았다. 두 캔을 마시는 순간 열과 성을 다해 고른 스스로가 무색해졌다. 해서 어느 순간부터 적당히 마실만한 맥주를 조금 더 저렴하게 사서 마시고 있다.



 물론 기념할 만한 날이거나 기분이 조금 더 좋은 날은 다시 좋아하는 맥주 혹은 보다 색다른 맥주를 찾는 노력을 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해서 간만에 먹고 싶은 맥주를 골라 샀고 그 맥주를 저녁에 마시고 있었는데 아이가 물어본 것이다. ‘아빠, 맥주가 맛있어?’ 기념할 만한 날이어서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맥주를 골라 샀고 그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니 ‘어, 맛있어!’ 하고 답이 나왔어야 하는데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딱히 그런 답이 나오질 않았다.



 주로 마셔 본 술이 소주와 맥주에 그쳐 술맛을 몰라 그럴 수도 있지만 돌아보면 술은 별로 맛이 없는 거 같다. 술자리의 분위기와 술에 취해 적당히 풀린 기분 그리고 맛있는 안주가 좋았던 거지 술은 그냥 뭐... 물론 술자리의 그 분위기와 취해서 적당히 풀린 좋은 기분 그리고 맛있는 안주를 연결하는 매개는 분명히 술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맥주나 소주 이외의 다른 술도 많이 마셔 봤지만 해서 어! 이건 맛이 조금 있는데 하고 생각한 술도 있지만 그럼에도 굳이 또 다음에도 찾아 마실 만큼 훅하고 땡기는 술은 이렇다 하게 없는 거 같다. 맛이며 질 등이 괜찮다고 소문난 주종이나 브랜드의 술은 보통 가격이 비싼데 그런 술을 간혹 마셔 봐도 가격이 비싸 맛있는 건가? 맛있어야 하는 건가? 하고 느끼는 거지 굳이 찾아서 내 돈까지 들여가며 마실 만큼 맛이 있었던 거 같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마셨음에도 딱히 맛있지도 않고 돈도 들어가고 속도 버리는 술인데 이쯤 되면 그냥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엄청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언제까지 일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술을 마실 거 같은데 아마 중간중간 술이 맛있냐고 누가 또 물어본다면 글쎄... 쓰읍... 그런데 뭐 또 무료할 수 있는 삶의 기분 좋은 윤활제 정도로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아서 계속 마실 거 같다. 그런 윤활제로서의 역할도 의미가 없어지는 날 술을 끊을 거 같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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