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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May 31. 2021

유년시절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나를 알아가기 위함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기억을 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나면 나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런대로 써 보려 한다. 다소 두서가 없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 두는 바다.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소리다.     

 


 때는 바야흐로 일천 구백 칠십 구 년 시월 이십오 일…. 누가 요즘 이런 표현을 쓸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시기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기대를 안고 태어났다. 사실 그 시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내 기억 속엔 전혀 없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분명히 내가 실제로 태어난 해에 나라에 어마 어마한 일대 사건이 발생했으나 나에겐 그저 역사 속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물론 시대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내가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엔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다만, 내가 태어난 사실도 실제이며 그 사건도 실제지만 내 삶과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배움에 의해 머리로는 연결이 되고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나, 그때의 나와 그 사건이 서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설명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태어난 해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저 역사인식의 부재를 욕먹을까 하는 노파심에 궁핍하게 부연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인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어렴풋한 기억에 의지해 보면 나는 호기심이 많았던 거 같다. 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보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 보통 살았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도 마당이 있는 그런 집이었다. 엄마는 주인집 아주머니와 함께 마당에 자리를 깔고 무언 갈 하고 있었고, 나는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얼마 뒤, 내가 사라 졌음을 엄마가 인식했고 상당히 놀랬다고 한다. 어린 아들이 사라졌으니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동네 사람들이 총동원돼 나를 찾았다고 한다. 찾고 보니 집에서 꽤 먼 곳까지 가 있더란다. 어떤 아저씨와 함께 있기에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어린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따라다니기에 위험하겠다 싶어 잡아 뒀다고 한다. 이름도 뭐도 모르는 그분께 한참 지난 지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엄마의 아들로 자랄 수 있게 해 주셔서.     

 


 어느 날엔 할머니 집에 놀러 갔는데 아랫집에서 새 한 마리를 잡아 뒀다고 해서 신나게 구경하러 갔다. 어린 마음에 하늘을 나는 새를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꽤 들떴던 거 같다. 그렇게 새를 구경하러 갔다가 개에게 엉덩이를 물려 버렸다. 나는 아픈 것보다 놀랐고 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아쉬웠던 거 같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말 그대로 버선발로 뛰어 오셨고 졸려도 절대 자면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시고 읍내에 약을 사러 가셨다.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렸던 기억이 있으면 보통 트라우마가 남아 개나 동물들을 싫어할 법도 한데 그렇진 않다. 오히려 사람보다 개나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개에게 물린 아픔과 공포보다 새를 더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긴 컸나 보다.     

 


 또 한 번은 몇 살 무렵인지 친구들과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놀다 공사장에서 볼 법한 커다란 대못이 박혀 있는 각목을 하나 봤다. 무슨 호기심인지, 무식한 건지 그 대못을 발로 콱하고 밟아 버리면 못을 나무에서 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은 왜 한 건지, 그리고 뽑아내서 뭘 하려고 한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그러니 무식한 쪽 보단 순수한 호기심이 맞다. 다만, 방법이 무식했을 뿐이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정말 과감하게 박혀 있는 대못의 뾰족한 부분을 그냥 밟아 버렸다. 결과는 보기 좋게 못이 신발을 뚫고 발바닥에 박혀 버렸다. 세상에 없는 소리를 질러가며 죽는다고 울어 재꼈다. 그 와중에도 왜 대못이 안 뽑히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약간 멍청한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더 많은 에피소드를 써 보려 했으나 자칫 단순한 지난날의 기록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여 이번엔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럼에도 내가 목적한 나를 찾겠다는 이 과정은 글쓰기를 통해 계속해 나가려 한다. 이런 내용의 글쓰기가 나를 찾아 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할 수도 있다. 차라리 일기를 쓰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지난 일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지난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이루는 데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 작건 크건 간에 말이다.


 흙 한 줌도 세상을 이루는 엄연한 일부다. 그러니 이 방법이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찾아가는 데 있어 지금으로선 이만한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빛바랜 사진마냥 퇴색되어 가는 기억들. 시간의 풍파에 의해 부스러져 가는 바위 같은 기억들. 모두 그러모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본골격을 우선 구성해 봐야겠다. 그리고 그 골격 사이사이를 세상을 바라보는 내 관점들로 채워야겠다. 그럼 내가 누구인지 조금은 알 수 있겠지? 내가 세상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찾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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