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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Aug 02. 2021

진실!?

 가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껍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쪽이 끝인지, 저 쪽이 끝인지 모르겠지만 붓 같기도 하고, 솔 같기도 한 것이 달려 있습니다. 부드럽다고 할 수는 없으나, 딱딱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잘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구부려지기도 합니다.      

 


 가운데가 갈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가운데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분리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운데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이긴 합니다. 왠지 툭툭 치고 싶은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그래서는 되는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면이 있어 툭툭 쳐 보기도 합니다. 가운데를 잘못 만지면 냄새가 날 수도 있습니다.     

 


 우선 넓습니다. 좌우로 조금 기울어진 듯 하지만 잘만 자리를 잡으면 앉는 것은 물론이요,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좌우로 기울어진 가운데는 우리 옛 집인 한옥의 대들보 같기도 합니다. 왠지 앉고 싶고, 기대고 싶습니다. 그리고 눕고 싶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거목이 될 듯 한 나름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튼튼한 기둥 같은 것이 네 개 있습니다. 작은 아이라면 매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네 아이가 놀며 웃고 까불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량을 베풀어 줄 것 같은 기둥이기도 합니다. 기둥이 아량을 베풀어 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웃기지도 않지만 말 그대로 그런 느낌이 듭니다.     

 


 널찍합니다. 연잎 같기도 합니다. 마른오징어의 귀를 천 배, 만 배쯤 키우면 크기가 비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산으로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열대야로 고생하는 뜨거운 여름밤엔 배는 차가우면 안 되니 덮기에 좋은 작은 이불 같기도 합니다. 옛날 임금님에게 씌워 드리던 일산日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가느다랗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두꺼운 편입니다. 그리고 길이가 깁니다. 구멍도 두 개나 뚫려 있는데 구멍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건지 일정 깊이까지만 파여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멍 안을 들여다봐도 새까매서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짧은 손가락을 넣어 봐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유자재로 구부러져서 다양한 용도에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멋진 무기처럼 보입니다. 연한 베이지색처럼 보입니다. 가공하면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갈아 내면 날카롭고 뾰족한 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칼로써의 효용이 아니라면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보기에 따라 아름다움을 줄 수 있어 탐이 나기도 합니다.     

 


 일곱 사람이 보고 만져 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일곱 모두가 다른 걸 본 것 같지만 그들이 본 건 전부 ‘코끼리’였습니다. 서로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내가 보고 만져 본 것이 코끼리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를 무시하며 말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과해져 몸싸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들 중에 틀린 사람이 있을까요? 틀린 사람은 없고 다른 사람들만 있습니다. 저들 모두는 분명히 코끼리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만, 자신의 관점으로만 판단을 했다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음을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시선으로 내가 본 것만 인정하지 않고, 부족한 내 관점을 바탕으로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이 다툼이 있을까 합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상당히 자주 진실이라는 환상 속에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편협하고 부족한 시선으론 분명히 사실이 맞고 진실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부에 국한한 단편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린 번번이 다름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착각합니다. 일상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름과 틀림을 혼동합니다. ‘오늘 입은 옷은 어제 옷하고 틀린 거네?’ 어제 입은 옷은 정답이고, 오늘 입은 옷은 오답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일상에서 정말 아무렇지 않게 혼용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틀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편협하고도 부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결론 내린 사실 혹은 진실을 바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서로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일곱 명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시각이 좁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했다면 서로의 의견 교환을 통해 정확하고도 진실된 코끼리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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