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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Aug 17. 2021

의식의 흐름대로

업무시간 중에 농땡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보려 한다. 난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다. 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다. 지금도 사실 업무 중이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업무들이 화상으로 진행된다. 전사적인 일정 진행 중이다. 상무님의 일장 훈시 중이다. 원팀이 어쩌고저쩌고 잘해 보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난 이런 부분이 조금 짜증이다. ‘원팀’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최근에 끝난 올림픽 때문이리라. 뭐랄까. 조금만 이슈화되면 그 부분을 써먹으려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약간의 거부감이 든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렇게 활용하는 부분이 대수겠냐만은 약간의 반골기질이 있는 것 같다. 우습다. 이런 이야기하면서 역시 뭐 대단하다고 반골이란 단어까지 끄집어내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난 꽤 성실한 편이다. 초등시절엔 꾀병도 곧잘 부려 학교를 빼먹곤 했다. 하지만 중등 3년, 고등 3년 총 6년은 개근을 했다. 단 하루도 학교를 빼먹지 않았다. 대단하면서도 바보 같고 폭력적인 느낌까지 든다. 사람이 6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가다니. 내 아이는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물건 정리도 잘한다. 같은 모양으로 줄도 잘 맞춰서 예쁘게 잘 정리한다. 물론 강박적으로 까지 정리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스트레스라…. 하라는 거 잘하고, 하지 말라는 거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은근히 반골기질이 있다. ‘아니 근데 썅….’ 이런 느낌이랄까? 여하튼 그렇다. 상당히 모순적이지만 그렇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디 한 두 마디로 설명이 되겠나 하고 생각해 보면 이해도 된다. 이런 성격의 가장 큰 단점은 매번 잘하다 한 번 정도 못 하거나 안 하게 되면 그 부분이 주변에 그렇게 부각된다. 그것도 스트레스다. 그래서 반골기질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성실한데 반골기질이 있다. 말을 잘 듣는데 반골기질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 아까 상무님에 이어 대표님의 말씀이 시작되고 있다. 매번 같은 이야기. 처음 한 두 번은 상당히 인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늘 들으니 짜증 난다. 듣기가 싫다. 사원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늘 이야기하는데 정말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드는 건 뭔지 모르겠다. 내가 꼬인 걸 수도 있다. 내가 꼬인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속 편하다. 문제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것보다 나에게서 찾으면 속이 편하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의 일은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조금 살아온 인생 경험에 의하면 사람과의 관계 속에 발생하는 문제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하는 경우는 없다. 잘못의 비율이라는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비율의 차이일 뿐이지 대부분의 문제는 쌍방과실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알고 있다. 내 잘못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어떤 부분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내가 잘못한 부분을 그렇지 않다고 다른 이에게 팔밀이를 하는 과정에서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멘탈이 좋은 사람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팔밀이하는 과정에서 속이 불편해진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멘탈이 좋다고 하는 것도 웃기다. 멘탈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싸가지가 없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그렇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멘탈이 강하니 싸가지도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이중성이 있으니 멘탈 강하다고 하는 부분도 싸가지가 없다는 부분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내가 뭘 쓰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괜찮다. 글 제목이 ‘의식의 흐름대로’이다. 말 그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중이니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다. 우리가 관용적으로 많이 쓰는 표현 중에 하나가 ‘오만가지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어느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에 오만가지 정도 생각을 한다고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하루의 오만가지 중에 몇 가지 정도는 될 것 같다. 분량이 한 페이지 반을 향해 가고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 두 페이지는 채워야겠다. 글쓰기를 시작하자고 마음먹은 순간에 나름 결심한 부분이 있다. 바로 작가가 될 수는 없으니 연습을 하자. 연습은 하루에 무슨 글이건 간에 한 페이지는 채워서 쓰자. 매일 지키지는 못했다. 앞에서 성실한 편이라고 했는데  신뢰가 상당히 떨어진다. 뭐 어쩔 수 없다. 성실한 것도 나고, 게으른 것도 나고, 반골기질이 있는 것도 내가 맞기 때문에 상관없다. 작가가 된다는 건 어떤 면에선 나를 대중에게 파는 것이다. 즉, 내가 정확히는 내 생각이 상품이란 소리다. 상품을 팔기 위한 최우선은 상품의 질일 것이다. 그다음쯤이 그 상품을 잘 알고 있느냐 정도일 것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아야 잘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모습을 다 까발리고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결정적인 문제다. 내가 나를 까발리는 건 상관이 없는데 그 외에 뭐가 없다. 그 외에 할 이야기가 마땅치 않다. 이것도 써 보고 저것도 써 보고 하는데 영 부족하다. 아니 조악하다. 이걸 누가 읽을까 싶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이쯤 되면 이건 글이 아니라 배설이다. 배설하는 주제에 글이랍시고 공개적인 공간에 올리는 꼴이라니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자신감이라기 보단 무식함이 어울릴 것 같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다. 그런데 또 이 ‘무식한 용감함’으로 인해 난 분명히 무언 갈 하고 있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건지, 살기 위해 태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빌어먹든 뭘 하든 사람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적당히 살다 가면 태어났으니 사는 것일 테고, 그게 무어든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면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일 거다. 그런데 이 또한 정답은 아니다. 적당히 사는 것이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지도 이 세상을 이루는 하나다. 즉, 존재 자체가 의미 있는 행위(?) 일 수도 있다. 점점 한계가 다가온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왕 쓴 거 두 페이지는 채우려 했는데 더 이상 쓰기 힘들어진다. 지금 내 수준이 딱 이 정도인 것 같다. 어떤 주제도 없이 순서도 없이 아무 내용이나 뇌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페이지 채우기 힘든 수준. 이것이 지금 정확한 내 한계다. 이 글은 꼴같잖은 퇴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뭐 물론 평소에도 퇴고를 엄청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다. 문단을 나누지도 않았다. 카톡 하나를 보낼 때도 상대방이 읽기 쉬우라고 하나의 행을 짧게 쓰는 편이다. 그런데 이 글은 그딴 거 다 무시했다. 왜? 제목에서 이야기했듯이 의식의 흐름대로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배설하듯이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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