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다시 보는 우리의 삶.
다시 하겠다.
오리지널은 2004년작,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 재개봉한 영화 노트북이다.
최근 코난 쇼에서 코난 맥아담스(?)와 라이언 레이놀즈가 패러디하면서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노트북의 줄거리는 굉장히 심플하다.
매력적인 젊은 남녀 주인공 노아와 엘리는 카니발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열열한 사랑을 나누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혀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클리세와 시대를 잘 반영한 세련된 레트로 패션으로 눈까지 즐겁다는 사실을 빼면 조금 특별한 멜로 영화에 머물뻔했던 이 영화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명작의 반열에 올라선다.
노트북은 내 생각엔 명작이 맞지만, 모두에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영화는 잘 포장된 치정극이며 바람을 옹호하는 영화라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보편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람을 옹호하고 있는가? 이건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미성숙한 시기를 거쳐 7년 후 다시 만난다.
극 중 노아와 엘리 역시 모두에게 손가락질당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 그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영화는 바람이 옳고 그런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영화는 이성적인 이유와 본능적인 이끌림 사이에서 단지 선택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엘리의 엄마는 자신이 숨겼던 노아의 편지를 엘리에게 건넴으로써 엘리에게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린다. 갈등하는 엘리에게 약혼자는 "약혼자가 내 약혼녀에게 결혼해달라고 빌어야겠어?"라며 바람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단 선택을 강요한다. 이 부분이 잔인한 점은 엘리는 어떤 선택을 하던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우리 누구도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또한 세월이 흐른 뒤 엘리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면서 분노한 관객들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어떠한 사랑도 현실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2004년 처음 이영화를 봤을 때 필자의 나이는 갓 20세를 넘었던 시기였고,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연애 같지 않은 연애 중이었으므로) 이 영화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노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엘리에게 지고지순한 노아의 모습을 보며 "역시 남자라면 순정이 있어야지. 일편단심 민들레!"라고 감탄했지만, 결혼까지 한 지금 노아의 모습을 보면 마치 고행하는 순례자 같기도 하며 엘리에 대한 사랑은 연민과 책임이라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동경하는 사랑의 형태는 뜨거움과 설렘이겠지만, 연민과 책임 그것 역시 사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지지고 볶는 치정과 헌신적인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며 노년의 연인이 함께 눈을 감는다는 최고의 엔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지금에도 여전히 노아와 엘리를 힐난하겠다고 해도 그걸 나무랄 마음은 없다. 다만 여전히 그곳만 바라보는 당신을 조금 연민하게 될 것이다.
영화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건,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영화인 탓이다. 또한 우리는 각자의 해석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후반부의 사건인 노아와 엘리의 바람에 분노했다면, 우리는 전반부의 노아와 엘리의 장벽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결국 현실의 장벽에 굴복해 울며 겨자먹기로 각자가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 알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방해가 있었다. 노아의 편지는 단 한 장도 엘리에게 닿지 못한다. 그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끈이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부모라는 장벽이 두 사람의 실타래를 헝클어뜨린다.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집착에 가깝고, 아직 미성숙한 사랑은 쉽게 주변의 영향에 흔들린다. 그리고 미성숙했던 두 사람에겐 어른이라는 존재는 커다란 장벽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이 사랑이 좀 더 강했다면 극복했을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강했다면 주변 사람의 방해 역시 그만큼 강해졌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이별은 둘만의 책임이 아니었고,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거다. 애당초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들 약혼녀인 엘리가 책임을 피해갈 순 없다. 그리고 엘리는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개인일 뿐이며,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있지만 행동할 수 있는 권리 역시 있다.
나는 엘리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변호하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 연인의 사랑 그리고 연인의 변심까지도 결국 사랑이다. 사랑의 범위는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넓고 그 형태는 다양하다. 만약 스스로 끝내지 못한 인연이 있다면 스스로 매듭짓길 바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랑을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고, 부디 당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길 바란다.
영화 <노트북>은 치정극인 동시에 "happily ever after"란 얼마만큼 어려운 것인지를 인과를 통해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