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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Aug 14. 2021

[영화] 베스의 마지막 아침

<작은 아씨들> 감상평

서늘한 기운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날 위해 집에 있는 모든 장작을 사용한 듯 방안은 무척이나 후끈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섬짓하다. 왼편에는 날 간호하다 지쳐 잠든 조가 보인다.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려 창밖을 응시한다. 찬바람이 들어온다며 늘 가려 놓은 창이 오늘은 훤하게 커튼이 젖혀 있다. 별의 반짝거림을 보니 우습게도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나는 이런 순간이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이란 걸 잠들기 전 다녀간 의사의 표정에서, 또 어머니의 붉어진 눈가에서 알 수 있었다. 내 몸을 잠식하는 고요함에 오히려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탁. 고개를 돌리니 조의 깃펜이 그녀의 손가락을 벗어나 굴러가고 있는 게 보인다. 종이 원고도 곧 떨어질 참이다. 날 위해 소설을 써달라고 했을 때, 조의 눈을 보며 그녀가 곧 펜을 들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 마치는 시작을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다. 무언갈 시작할 때, 조는 천 번 정도 연습한 곡을 연주하는 사람 마냥 들숨 한 번 내뱉고 휘몰아치듯 끝내 버린다. 조에게 시작을 종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조는 어렸을 적부터 유독 나에게 관대했고 요즘에는 특히 더 그랬다.


조는 내 영혼의 따스함 때문에 조언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라면, 조는 뜨거운 사람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조 안에는 불꽃이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에이미는 어렸을 적 조의 늘상 헝클어진 머리는 가슴속 불에서 나는 연기 때문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엄마는 그게 ‘기질’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기질이란 마음속 불꽃을 태울 장작의 종류와 양이라고 설명했다. 석탄인지, 통나무인지, 마른 나뭇잎인지 혹은 주먹만큼 있는지, 방 하나를 태울 만큼 있는지. 그리고 기질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내 기질은 온화하고 따스워서 늘 집을 따습게 대우고, 이웃에게도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며 엄마는 내 역할도 조 못지않게 소중하다고 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 안다. 누군가는 집을 돌보며 이웃을 살펴야 했다. 나 역시 일평생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강렬한 영감은 받지 못했어도. 신이 인도하는 잔잔함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하지만. 마미의 말을 너무 빨리 믿었나 보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이 주어진다면, 한 번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그 말에 너무 빨리 수긍해버렸나 보다. 나에게 아직도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격동이 느껴진다. 죽기 전 내 마음의 장작이 이렇게 모두 태워지나 보다.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았다. 내 눈물은 질투의 눈물이다. 조도 몰랐고 마미도 몰랐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내 마음에 질투가 있다. 인생의 개척자들을 향한 질투가. 조금 진정이 될 때까지 난 조용히 흐느끼다 고개를 들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끈적한 졸음이 몰려온다. 난 침대에 도로 내 몸을 뉘었다. 방금의 감정들을 후회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아쉬움. 몰려오는 잠 기운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모든 것에 안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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