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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Jan 17. 2022

소실점을 향한다는 건

[독후감]숲의 소실점을 향해_양안다 시집, 민음사, 2020-05-25

난 언제나 바다를 두고 세계를 대입시키곤 했는데. 나의 바다는 그리웠던 평안이 가득하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위로를 쏟아낸다. 지나갈 거야, 너도 마침내 쓸려 내려갈 거야, 곧 흘러갈 거야, 나의 바다는 속삭이는 투로 말하곤 했다. 바다는 모든 존재를 지우고 나 하나만을 남기기에 위안이 된다.


숲은 바다보다 집단적이고, 아파하고, 신음하다. 그의 세계는 숲이었는데, 그의 세계가 숲이라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는 숲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끼면서도, 아름다움을 인식하기에 추악함도 맡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진심은 어디에 놓여있나

만남과 마음은 왜 시작되나

한 사람의 일상을 뒤흔드는 존재는 왜 언제나 사람이었나

왜 그 사실이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는 끝내

슬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폭우 속에서 망가진 우산을 쥐고, P55-


그의 그린 사랑이 아름답다. 불타오르는 숲 가운데에서도 일순 그를 평안하게 만드는, 유리칼과 손목과 바닥을 모르는 추락에서도 소실점을 향하게 만드는, 마침표가 없는 그의 시에서 쉼표와 물음표를 만드는 사랑. 그의 고백을 듣고 있자면 절로 대상이 궁금해지고, 고백을 이끌어낸 것이 대상인지 그의 마음인지 궁금해진다.  '사랑은 폭우 속에서 하나의 우산만 챙기는 거'라는 달달함에 스며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엘리는 말했다  (중략) 아무도 없는 거리와 우리의 내부를 노래로 가득 채웠다.

(중략)
폭우 속을 함께 걷기 위해서 하나의 우산만 챙기는 거라고, 쏟아지는 비에 어깨를 적시며 윤은 말했다 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흔들거렸고

-나의 아름답고 믿을 수 없는 우연, P17-

밤의 극장은 아름다워 나는 영화보다 극장을 더 사랑했지 당신을 밤의 극장으로 데려갔어 내가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려고

-인디언 서머, P50-


그러나 사랑은 숲의 잔혹함을 인지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서로의 이름을 되뇌지만 결국 완전히 가까워지지 못하는 '우리'에 담긴 저주를 인지하기도 하고, '6월의 벌레들이 과일에 꼬이기 시작하'는 여름날 그는 소매를 드러내게 하는, 사랑하는 이의 칼날 자국을 보이게 하는 소매의 배려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세계의 폭설을 계속되고 소음은 더 가까워진다. 


이유만 타당하다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괜찮다는 마음, 우리가 함께 타다 만 숲을 지나 갈 때 당신이 짓게 될 표정을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방화범이 누구냐고 묻고 싶겠지만 지금 나는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중략)
 차라리 위로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불타는 숲에서,
재와 연기 사이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고
인간이 죽으면 저런 소리도 낼 수 있구나 
하지만
그 이유를 몰라서,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양초 하나를 켜 놓은 채로
방화범이 왜 불을 질렀을지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중략)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망가졌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휘어진 칼, 그리고 메그놀리아, P27-
도시의 옥상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저 멀리 고층 건문들이 있고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늦은 시간에도 도로가 가득 차 있잖아 이 풍경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서

(중략)
유리 조각으로 팔뚝을 긋던 남자가 말한다.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속도입니다

(중략)
창밖에서 비명이 들리는데 아무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더라 나 혼자 창 앞을 서성이며 비명의 근원지를 찾고 있더라 혹시 나에게만 들리는 비명이지 않았을까?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 목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붙였던 게 아닐까? 형광등이 터지기 직전처럼 점멸하고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소음과 비명을 도대체 무슨 수로 구분해야 하는 걸까
-유리새, P21-


그가 향해 간다는, 소실점을 나는 멋대로 만남이라 짐작했다.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속도입니다'라는 그에게 이해한다고도, 당신과 같다고도 말할 수 없는 나는 그에게 텅 비었더라도 응원을 보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걷다 보면 향하며 가다 보면 소실점에 다다라, 소멸이 있는 곳에 만남도 있지 않을까. 그 만남이 어쩌면 그에게 평안과 위로가 되지 않을까. 사실 위로는 텅 비어있지 않았고, 그가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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