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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Aug 14. 2021

[개샛길]베끼고 싶은 시선

개-샛길 프로젝트 첫 번째, 민혜 이야기

이 글은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개-샛길 프로젝트는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 압박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샛길로 빠져보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주위 사람 100명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삶이 무료한 사람에겐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극적 장면임을, 삶이 풍랑 같다고 느끼는 이에겐 결국 삶이란 조각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걸 전달해 따스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글이 누군갈 찌르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제 주위가 되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베끼고 싶은 시선


그는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빵집 부매니저였다.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빵집은, 대학가 근처 카페거리에 위치한 탓에 늘 북적댔다. 손님이 많아 가게가 붐볐고, 단기 알바생도 넘쳤다. 빠르게 맺고 끊어지는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6개월 정도를 함께 일했다.


6개월은 몇 번의 술자리와 따뜻한 수다로, 예의로 포장된 거리감을 좁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묶어주었던 것은 공동 적의 존재였다. 당시 우린 한 상사를 두고 있었다. 그 상사는 흡연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근무지를 이탈하고, 알바생들에게 종종 감정적인 피드백을 하며, 근무 시간을 멋대로 조정하곤 했다.


이 동화 같은 곳을 책임질 매니저 자리는 꽤 오랫동안 공석이었다. 예쁜 조명 아래에서 잠깐 짬을 내 돈을 벌고자 한 사람은 많지만, 조명이 꺼진 후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정산하는 자리를 원하는 이는 없었다.


민혜는 ‘부’ 매니저였다. 그는 원래 알바생이었는데 매니저 지원자가 없던 탓에 상사의 권유로 부매니저가 됐다. 민혜의 모든 설움은 근본적으로 해당 직책의 부조리함에서 비롯됐다. 부매니저는 매니저가 하는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혜택은 거의 누리지 못하는 직책이었다.


매장을 관리 감독하는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니, 겉으론 문제없어 보여도 사실 내부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런 종류의 파국을 상상하기엔 문제없을 테다. 다들 독단적 상사가 있는 근무지 하나쯤 알고들 있을 테니. 물론 그 상사가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다.  상사는 때론 재밌었고 때론 다정했고 때론 알바생의 상황을 융통성 있게 고려해줬다. 하지만 그런 어중간함이 되려 더 비극적이었고 그의 친절은 편파적일 때가 많았다.


민혜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종종 빵집을 얘기하곤 했다. 그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아주 많이 얘기했는데 점차 언급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의 찡그렸던 얼굴이 펴지는 걸 보며 아, 점점 덜어지는 중이구나 그의 감정의 정도를 추측해 보았다.


우린 지금보다 서로를 더 모를 때, 가끔 만나 카페에서 수다 떨고 가끔은 운동도 하는 사이가 되기로 했다. 우리가 함께 일했던 사이를 넘어 우정을 바라보게 된 건 순전히 그의 따뜻한 시선과 사려 깊음 덕이다.


빵집을 그만둔 후에 동네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할 말 하는’ 사람이라 친해지고 싶었다 말했다. 칼퇴근을 해서, 대타하라는 억지 요구를 따르지 않아서, 매니저의 농땡이에 가끔가다 한 마디씩 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면서.


빵집에서의 난 예의 있게 행동하려 했지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난 타인에게 벽을 쉽게 허물어트리지 않는다, 특히 일하는 곳에선 더욱. 날 향한 그의 칭찬은 내 행동이 아닌 그의 따스한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나처럼 되고 싶댔지만, 난 되려 그처럼 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시선을 베끼고 싶었다. 원래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질투까지 났다. 민혜가 해주는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스무 살 초입을 떠올리게 된다. 입시학원에서 열정 페이 당하면서도 학원 선생님을 좋다고 따라다니던.


그때의 행동을 반복하고 싶진 않지만, 그때의 순수를 잃어가는 건 아쉽다. 때 묻지 않았던 유순한 시선과 타인의 좋은 점에 먼저 집중할 수 있었던 여유. 내가 빵집에서 상사의 억지 요구에 날 선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건, 스물네 살이 알바 환경에서 나이 권력을 쥘만한 연차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난 순수와 권력을 맞바꾼 것일까.


민혜에겐 순수가 있다. 그게 그의 눈을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그가 친구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너무 큰마음을 주게 된다는 얘기를 할 때, 군대에 간 남자 친구의 장점을 하나씩 나열하며 무조건 기다리겠다고 할 때, 자신과 많이 다른 친언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그의 눈은 아주 반짝거린다.


요즘 그의 고민은 오랜만에 복학해 시작하게 될 대학 생활인 것 같다. 걱정이 무색하게 난 그가 아주 잘 해내리라 아직 시작도 안 한 그의 대학 생활을 점쳐본다. 그의 시선이 따뜻한 관계 속으로 그를 데려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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