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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름 Aug 26. 2023

"걔는 뭘 하고 산대?"에서 걔를 맡고 있습니다

간호사 퇴사일기

물론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퇴사한 것은 아니다. 병원을 그만두기 2달 전부터 내년에 있을 소방공무원 경력채용을 목표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처음 한두 달 공부를 해보고 이번에도 자신이 없으면 그만둘 요량이었다.



불과 2년 전에도 소방공무원에 도전한 적 있었다. 하지만 3교대 근무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공부 시간을 지켜가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평균 12시간 근무를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가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도 몽롱한 상태에서 진도가 나갈 리 없었다. 간절함보다는 간호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절박함이 더 컸다.

그래서였을까. 목적의식 없이 시작한 도피성 공부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이라는 혹덩이를 얻고 나서야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허무하게 끝났다.

 


이번에는 달랐다.

당시 나는 어떤 때보다도 깊은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고, 하고 싶은 일 없이 하루를 살고 있었다. 삶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였다. 문득 소방공무원에 합격해서 어느새 소방학교를 졸업한 후배가 생각났다. 합격을 축하할 겸 모인 자리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병원보다는 훨씬 나아요.” 배시시 웃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그때는 병원을 떠나고도 힘든 일을 선택한 후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응급실에 근무했을 때 마주친 구급대원은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간호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후배는 돌고 돌아서 자신의 적성을 찾아 소방공무원이 된 후에야 만족감을 느꼈다고 했다. 평균보다 작은 체구인데도 간호사보다 체력적으로 힘든 구급대원 업무가 병원보다 훨씬 낫다니. 합격의 기쁨에 으레 하는 말이라고 흘려 넘겼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병원을 떠날 발판을 찾을 때쯤  당시 귀 기울이지 않았던 후배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말 병원보다 일할 만하다고? 처음에 들었던 의문은 어느샌가 구급대원이 아무리 힘들다 한들 지금보다  낫다면 오히려 감사히 일하겠노라 굳게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어 있었다.

 


사실 응급실 간호사와 구급대원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 친해질 수 없는 관계다. 환자를 보내는 입장과 받는 입장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급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환자가 이송될 때마다 간호사는 강한 불만을 표출했고, 그럴 때마다 구급대원은 환자의 의사를 거부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날 선 말을 하기도 했다. 항상 일에 치이고, 환자에게 치이는 똑같은 을의 처지인데도 항상 서로를 보면 으르렁댔다. 구급대원이 될 바에는 차라리 간호사로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매일 똑같은 업무를 하는 일상이 답답해졌다. 창문 하나 없는 응급실에서도, 한강이 내다보이는 병실에서 일할 때도 매한가지였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똑같은 업무를 하고 똑같은 질환의 환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과는 다르게 한 곳에 가만히 일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병원이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났지만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계속하고 싶었다. 현장에 뛰어들어 어떤 응급 상황에도 척척 사람을 구하는 구급대원이 내게는 가장 최상의 선택지였다.

 


구급대원이 되어서 앰뷸런스에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할수록 마음속 깊이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다. 한편으로는 귀가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질주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바짝 마른침을 삼키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후 대면할 환자 상태는 어떨지, 내가 현장에서 과연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모든 의료진과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는 병원이 아닌 구급대원의 출동 현장은 가정집, 도로, 산 중턱 등 어디든 될 텐데 구급가방 달랑 하나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구급대원이 느끼는 한계는 간호사의 그것과는 결이 다를 것이다. 간호사로서 목격했던 허망한 죽음들, 그와 동시에 느꼈던 무력감. 구급대원이 되면 사망 현장을 수없이 목격해야 하니 일전에 내가 느꼈던 감정보다도 더 큰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구급대원이 하고 싶었다.

 

 

/

사직의 여운도 잠시. 10년 만에 전업 학생이 된 후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애당초 예상했던 필기시험이 한 달 남짓 앞당겨지면서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필기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체력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매일 2시간씩 하는 운동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씻는 시간까지 줄일 수 있는 시간은 전부 줄여나갔다. 당연하게도 친구와의 연락은 전부 끊었다.

 이따금씩 차오르는 외로움도 사치였다. 또다시 패배자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몰래 눈시울이 붉어진 날이 늘어갔다.



「다들 너 잘 지내냐고 물어보더라.」

3개월 후 필기시험이 끝난 날 모처럼 메신저를 열었더니 그동안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중에서 병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보낸 메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지.」

한참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내가 그럭저럭 살고 있었나. 고작 한 단계가 끝났을 뿐이었다. 병원을 떠난 몇 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 입에 내가 오르내렸을까. 30살 뒤늦은 나이에 공부하겠다고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둔 나의 근황은 소소한 가십거리였으리라. 하지만 으레 그렇듯 얼마 후면 나의 존재마저 희미해질 것이다. 내 기억에서 빛바랜 이들처럼.

 

 

/

필기시험은 작년에 비해 쉽게 출제되어서 단 한 문제로 합격과 불합격이 나뉠 정도였다. 평소 지나치게 긴장하는 편인데도 하늘이 도왔는지 시험날이 되자 이상하리만큼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전 과목 통틀어 한 문제밖에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체력시험과 면접이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기뻐할 수도 없었다.

 


필기시험이 끝나자 10명이 넘던 체력학원에 단 세 명만 남았다. 시험 당일 가답안이 공개되는데, 채점 결과 합격점수를 받지 못해 체력학원에 등록하지 않은 것이다. 코치는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한 적은 처음이라며, 공무원 인기가 많이 줄긴 줄었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정권이 바뀌고 첫해인 올해 채용 인원은 최근 5년간 평균의 40%도 되지 않았다. 매년 인구가 감소하는 만큼 공무원 채용도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원 감축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장 큰 걱정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 체력 점수였다. 무엇이 잘못된 지 알아도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공부처럼 틀린 문제를 오답 노트로 만들어서 반복해서 볼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 좀 해 놓을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최선에 최대를 더하는 수밖에.

 


하지만 조바심에 지나치게 욕심부렸던 탓일까. 체력시험을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어느 날, 며칠 전부터 시작된 갈비뼈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매일 고강도 운동을 몇 시간씩 하니 아픈 건 당연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점수가 가장 오르지 않았던 배(俳) 근력 종목 때문에 얼마나 아프든 간에 하루라도 운동을 쉴 수가 없었다. 배근력은 흡사 수박 꼭지처럼 생긴 ‘ㅜ’자 모양의 손잡이를 뽑아 당기는 힘을 측정하는 종목으로, 근력이 부족한 사람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광배근 부상을 입기 쉬웠다. 부상만큼이나 파울 당하기 쉬운 종목 중 하나였다.



그러다 몸에 축적된 피로가 한 번에 터지고 말았다. 연거푸 재채기하는 그 순간 내부 어딘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여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결과는 피로 골절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엑스레이를 보던 의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80대 폐렴 환자도 아니고, 젊은 사람이 재채기하다가 갈비뼈가 골절된 경우는 처음이네요.”

딱한 사정을 들은 의사는 자신이 진단서를 써줄 테니 체력시험을 미루라고 말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족히 한 달은 쉬어야 한다는 말에 서러움이 복받쳐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오늘은 운동 쉴게요. 갈비뼈 골절이래요.」

아프다고 할 때마다 꾀병 부리지 말라던 코치는 살다 살다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음날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눈물이 채 마를 새 없이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체력시험 당일이 찾아왔다.

 


시험장 앞 공터에는 일찍부터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시험장에 입실하면 따로 준비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에 다들 한두 시간 일찍 도착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나는 때늦은 롱패딩을 입고 트랙을 돌다 8시 반 정각에 맞춰 들어갔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았다. 필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 한 곳에 모아두니 견제하듯 서로를 곁눈질했다. 그제야 이 중에서 또 한 번 살아남은 자만이 면접시험장 입장권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몸소 와닿았다.

 

 

체력시험은 좌전굴(유연성), 윗몸일으키기, 악력, 배근력, 제자리멀리뛰기, 왕복 오래 달리기로 총 6개 항목을 측정하여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었다. 기록 경쟁으로 보여도 엄연히 점수 경쟁이었다. 이를테면 남들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내도 10점에 해당하는 기록을 받으면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기록 측정으로 단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파울을 받으면 소중한 한 번의 기회가 박탈되므로 사전에 공지된 파울 규정을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두 번 파울을 받게 되면 해당 종목은 자동으로 실격 처리됐다.

 


“수험번호 71번. 한 번 더 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측정에 만점을 받으면 다음 측정은 선택에 따라서 한 번 더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점을 받으면 나머지 종목 측정을 위한 체력 분배로 두 번째 측정은 하지 않고 끝내는 경우가 많아서 나 또한 한 번씩만 측정했다.



한 종목이 끝나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긴장감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엔돌핀 탓인지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그러나 문제의 배근력 차례가 되자 손발이 바짝 굳었다. 이 산만 넘으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여기서 실수를 하면 점수는 순식간에 미끄러질 터였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시도에서 과락 점수가 나왔다. 학원에서 연습한 낡은 기계와 다르게 새것이라 그런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2차 시도를 했다. 가능한 높은 점수를 받으려는 욕심은 마지막 종목을 앞두고 1점이라도 받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뒤바뀌었다. 그 순간 나만큼 마음 졸이고 있을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120kg 맞습니까? 확인하세요.”

다행히 2차 시도에서 만점은 아니었지만 만족할만한 점수를 받았다. 감독관과 함께 종목별 합계 점수를 확인하고 최종 서명했다. 60점 만점에 59점이라는, 기대 이상의 점수를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실로 오래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소방공무원은 통합 채용하는 대부분 일반직과 다르게 남녀 구분해서 채용하는 직렬 중 하나다. 그중 경력채용 구급 분야는 간호사 또는 1급 응급구조사로서 2년 이상의 경력이 응시조건이다. 병원에서 못 볼 꼴 다 본 사람들이니 그들의 독기는 어마어마할 정도다. 전 직렬 통틀어 필기와 실기 커트라인이 가장 높으니 말이다.

올해 소방사 채용 전형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필기 과목이 축소 및 변경됐을 뿐 아니라 체력과 면접 비중이 각각 25%로 상향되었다. 그래서 면접시험이 남은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낯선 사람 앞에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나는 면접 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면접 학원에 간들 하루아침에 꺼벙이가 유재석이 될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내 생각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나갔다. 매일 스터디 사람들과 두세 시간씩 모의 면접을 진행하다 보니 처음보다 말하기 연습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대구에 내려가 인적성 검사를 치르고 면접 전날 또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작년까지 본인이 지원한 시도에서 면접을 진행했지만, 올해부터 통합 채용이라는 명문하에 전국구 사람들이 대구로 내려가야 했다.

 


「지금부터 오전 3조 면접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지원자께서는 해당 부스로 입장해 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들리자 나를 포함한 모든 지원자들이 일제히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세 쌍의 싸늘한 눈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종료 방송이 울린 후였고, 나는 엉거주춤 인사하고 퇴장했다.

안도감도 잠시, 문 앞에서 서서 방금까지 내가 했던 말들을 빠르게 복기했다. 실수하진 않았는지, 잘못 말하진 않았는지 머릿속에 정리한 후에 자리를 떠났다. 이제 모든 것은 내 손을 떠났다. 조용히 합격 발표날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후련하다가도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떠오를 때면 속이 끓었다.

 


45일이라는 긴 시간 끌탕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족들과 모처럼 해외여행을 떠나도, 하루 종일 게임을 해도 전혀 재밌지 않았다.

큰 병원에서 일한 경력이 얼만데 무슨 취업 걱정이야. 주변 사람들의 위로에도 떨어지면 또다시 취준생이 될 텐데 지금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막연함 불안감이 엄습했다. 때로는 불안감이 분노가 되었다가 실망감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오지 않을 한 달 반이 지났다. 기다리다 지쳐서 최종 발표날 당일이 돼도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클릭 한 번이면 미래가 바뀌어 있을지, 아니면 취준생으로 남아야 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청승맞게 뭐 하는 짓인지 싶었지만 말이다.

일부러 혼자 카페에 앉아 용기와 망설임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와 가족들의 전화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들의 열화와 같은 재촉에 못 이겨 겨우 합격자 명단 파일을 클릭했다.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내리자 익숙한 수험번호를 발견했다. 꿈에 그리던 합격이었지만 두 눈 똑바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몇 번이고 수험번호를 확인한 후에야 곧바로 지인들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연락 한번 없어서 서운했다고 말하자 그들은 시험이 언제 끝나는지 몰라서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며 미안해했다. 앞으로 19주 동안 소방학교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받겠지만 그전까지는 자유의 몸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기쁜 소식을 알렸다.



너는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어.

‘당연히’라는 말에 담긴 그들의 기대감에 기분이 들뜨다가도 만약 내가 불합격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할지 궁금해졌다. 분명 ‘아쉽게’ 떨어졌다고 하겠지. 결과적으로 합격해서 다행이었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비슷한 말을 듣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9급 공무원 합격이 무슨 대수라고, 나의 노고를 치하해 주길 바라겠는가. 하지만 마음 졸였던 그간의 모든 일들이 몇 배속으로 앞당겨져 당연한 일로 귀결되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럴 대마다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스스로 대뇌였다. 고생 많았다고.



언젠가는 처음이 주는 설렘은 흐려지듯이 합격의 기쁨 또한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질 것이다. 가깝던 멀던 나는 또다시 자유를 찾아 떠날 채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걔, 요즘 뭘 하고 산대?”

가깝거나 먼 미래에 내 근황을 묻는다면 누군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마 잘 살고 있겠지.”라고.

 말대로 나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누군가의 걱정 없이도  살아갈 것이다.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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