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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까자까 Feb 17. 2023

왕따의 반격

지원군 등장



'더 글로리' 문동은처럼 치밀한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이 가끔 내 편일 때가 있다. 신은 세상에 존재한다고 살짝 힌트를 내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라고. 하나를 빼앗으면 반드시 하나를 돌려준다. 세상엔 공짜는 없고 부메랑은 반드시 돌아오더라.


그게 뭐든.







일하러 온 거야? 패션쇼 하러 온 거야?


냅둬~ 김자까자까는 공주잖아, 네가 이해해
(키득키득)


브라이언이 아침인사로 나에게 "헬로우 프린세스"라고 한날부터 괴롭힘은 시작되었던 걸까?

어쩔 땐 대놓고, 어쩔 땐 은근히 따돌리며 괴롭혔다. 힘쓰는 일이나, 더러운 일이나, 창고에 가는 일은 전부 나의 일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입고 오는 옷도 꼴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저들은 거의 민낯에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을 했다. 나는 매일 유니폼 대신 사복을 챙겨 입고 화장을 하고 출근했다. 전직이 패션 스타일리스트여서 그런지, 성격이 그런탓인지 난 꾸며 입는 걸 좋아했다.


말리나는 항상 영어로 나를 무시하며 상처 주었다. 일부러 말끝을 흘리거나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해서 여러 번 묻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또 못 알아듣는다며 심하게 면박을 주었고 옆에서 킴은 "김자까자까~언니 영어 공부 좀 더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하우스키핑 자리 났다니깐 ㅎㅎ" 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킴은 말리나가 한마디 하면 옆에서 꼭 두세 마디 더 거들었다. 영어로 나를 무시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어김없이 한국말로 이어갔다. 지도 영어가 짧으면서 영어가 더 짧은 나를 무시했다.


다이엔은 비웃음을 담당했다. 언니들이 나에게 상처 주는 말로 소금을 팍팍 뿌리면 은근히 동조하고 미소 짓는 역할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2대 1일 때보다 3대 1이 되니 타격감은 제법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얼마든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원펀치 쓰리강냉이에 내 마음은 너덜너덜 해졌다. 살면서 왕따를 당해 봤어야지 말이다. 한국에서도 안 겪어본 왕따를 호주 와서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자들이 입으로, 눈빛으로 나를 괴롭혔다면 조식 셰프 준은 대놓고 치사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혔다.



조식 뷔페: 구글 이미지 참고



뷔페 빵코너엔 다양한 빵들이 있다. 플레인, 곡물, 크럼펫, 잉글리시 머핀과 크루아상, 데니쉬, 꼬마 머핀 등. 빵이 떨어질 때쯤 다이엔이 준에게 말을 하면 준은 빵 바스켓을 달라고 한다. 그럼 준은 온갖 빵을 채워서 다시 바스켓을 뷔페 쪽으로 건네준다. 그런데 내가 준에게 빵이 떨어졌다고 말을 하면?

이미 예상했겠지만 쌩깐다. 두어 번 말을 하면 바쁘니깐 주방에 와서 빵을 직접 채워 넣으라고 신경질 적으로 말한다. 딱히 바빠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면 나는 빵 바스켓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 구박을 받으며 빵을 채워 넣는다. 본인이 들어오라고 해 놓고, 저쪽은 가지 말아라, 그쪽은 건들지 말아라, 빵은 그거 아니고 이거다 소리를 빽 질렀다. 참 유치하고 치사한 게이 할배였다. '흥. 꼭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했냐?'


조식 타임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친절한 사람은 설거지를 담당하는 키친핸드 마이클과 지배인 브라이언이었다. 아니러니 하게도 둘은 호주인이었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같은 이방인이었다. 한국인 두 명, 말레이시안 한 명, 일본인 한 명.


5시 30분부터 9시까지는 지옥 같았다.

그나마 9시에 브라이언이 출근하면 그들의 괴롭힘은 멈추었고, 직장 동료인척 나에게 대했기에 아무도 몰랐다. 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10시 30분이면 런치 스텝들이 출근해서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약 1시간 정도 함께 일했지만 서로 대화하고, 웃고 농담하고, 페이스북으로 남은 이야기를 소통했다. 그들은 나의 꿈을 응원했다. 열심히 해서 꼭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영어 교재를 추천해 주기도 하였다.


마이클은 호주식 영어와 슬랭을 자주 가르쳐 주었다.

아침 인사로 "Good morning" 대신

"G'Dday Mate(그다이 마잍 = 안녕~ 마이 프랜드)"

"Really?" 대신

"Fair dinkum? (페어 딩컴? = 진짜?)"

"What do you think?" 대신

"What do you reckon?(왓 두유 뤠큰 = 어떻게 생각해?)"

마이클과는 호주식 영어 표현으로 대화했다.  

티쳐 마이클이라고 불렀는데 마이클은 "티쳐"라는 단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점점 도가 지나치는 킴과 그들의 괴롭힘에 나날이 나는 지쳐갔다.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시작이 말리나였으니 최종 보스 말리나부터 제거, 아니고 대화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정말로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저들이 저러는지. 아니면 단순히 괴롭히는 건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땐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했다. 팀장님이던 부장님이던 하고 싶은 말은 꼭 하던 나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쭈구리 방탱이가 된 걸까? 언어를 잘 못하는 서러움과 지속된 따돌림은 당당하고 발랄했던 나를 바보천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시급이 센 이 아르바이트를 나는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

꼭 올해 말까지 만불을 모아서 계획대로 대학에 갈 준비를 할 테니깐.


다음날 조식 뷔페가 끝이 나고 레스토랑 정리가 거의 마무리가 될 때쯤이었다. 나는 어젯밤 연습한 대로 말리나에게 말을 했다.

"말리나 나 할 얘기가 있는대 지금 시간 좀 괜찮아요?"

눈이 똥그래지면서 살짝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킴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 그래요. 지금?"

"네, 지금요"


쾌쾌한 쓰레기 수거장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말리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제가 일을 제대로 못하나요? 저에게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인지 알려주세요"


말리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왕따가 이렇게 1대 1로 독대를 신청할지는 예상을 못 했었나 보다.

"글쎄... 네가 말을 한 번에 잘 못 알아듣잖아. 일도 잘 못하고."

"영어는 인정해요. 제가 말리나 보다 영어 못하는 거. 그런데 저 호주 온 지 이제 겨우 1년 넘었는데 영어 못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영어 배우려고 온 거고요. 조금만 친절하게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어젯밤 연습한 대로 영어로 질문을 계속 이어 갔다.

"그리고 일을 못한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어떤 일을 못한다는 거예요? 저는 매일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당당하던 말리나는 말문이 막혔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내가 일을 시작한 일주일 되던 때부터 일을 이상하게 했다고. 뭔가를 알려줘도 다른 방식으로 일을 했다고. 구체적을 어떤 일인지,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조식 뷔페 레스토랑 일은 심플 그 자체였는데 말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도 해보고,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도 해 본 나에겐 식은 죽 먹기 같은 일이었다. 영어 하나 빼곤 말이다. 그때 킴이 등장했다.


"무슨 일인데요?"

말리나는 킴에게 상황을 설명 헸다. 순식간에 1대 1에서 2대 1이 되었다. 좋은 취지로 말리나와 대화를 시도하려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는 흘러가고 있었다.


"김자까자까,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언니 일 너무 못해요"

"그러니깐 내가 무슨 일을 못한다는 건데? 말을 해 줘야 고치던지 할거 아니야"

"그런 걸 일일이 말을 해 줘야 알아요?"

"응.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얼마나 일을 못했기에 이러는 거야?"

킴은 영어로 말을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는지 어김없이

"엄.. 지금부터는 한국어로 할게요" 라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눈앞이 흐려졌다. 저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고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끝내 눈물은 떨어졌고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의 서러움과 억울함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킴과 말리 나는 당황했다. 그때 마침 런치 스텝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호텔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말리나 와 킴이 레스토랑에 새로 온 한국여자를 괴롭힌다고. 공교롭게도 쓰레기 수거장 뒤쪽엔 CCTV가 있었다. 카메라는 말리나 와 킴을 등지고 있었고 나의 얼굴은 고스란히 찍혔다. 2대 1 쓰레기 수저장. 팔짱을 낀 여자 두 명. 울고 있는 여자 한 명. 호텔 프론트 매니저와 직원들이 CCTV로 우리의 대화를 모두 보고 들은 것이었다.


웬일인지 다음날 프론트 매니저가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든 걸 다 보았던 것이다. 평상시 호텔 식구들과 가깝게 지냈던 나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이날 이후 조식 타임에 일을 하고 있으면 프론트 직원들이 한 번씩 레스토랑을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나에게 인사하고 말을 걸며 손님이 없을 땐 이런저런 농담을 하고 갔다. 마지막엔 초콜릿을 주면서 따스한 미소 지으며.


호텔 레스토랑 분위기는 반전이 되었다. 런치 스텝들이 출근하면 항상 말리나나 킴에게 에스프레소나 라떼를 부탁했었는데 나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다가와 더 말을 걸고 더 친절하게 웃었다. 킴과 말리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달라진 것이다. 다이엔은 다행히 걸리 않아 다시 중립이 되었다. 운도 좋은 년.


이날 이후 나는 왕따에서 은따로 괴롭힘 레벨에서 한 단계 다운그레이드되었다.




로이스 호텔 프론트: 구글 이미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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