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장 CCTV로 생중계가 된 그날 이후 킴과 저들은 나를 은따 시키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친해지려 했지만 이유 없는 괴롭힘과 따돌림에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저들에게 결코 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쓰레기장에서 눈물 콧물을 보인 것이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더 이상 대화로 풀어보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늘부로 저들을 왕따 시키기로 결심했다.
일적으로 꼭 해야 되는 대화가 아니라면 저들에게 말을 일절 걸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180도 달라진 왕따의 눈빛과 태도에 저들은 웅성 웅성 거렸다. 더 이상 눈치를 보지도, 매일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해 보려던 노력도 그만두었다. 어차피 호텔 조식 뷔페일은 간단했기에 특이 사항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하는 일은 같았다. 뷔페를 세팅하고, 필요한 음식을 채우고, 알라카 메뉴 오더가 들어오면 주방에 넘겨주면 그만이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했고, 말리나 가 시키기전에 알아서 창고로 가서 재고 정리를 했다.
그들의 미움에 신경 쓰고 마음 다치는 일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집중하기로 했다. 없던 일까지 만들어 하다 하다 할 일이 없을 땐 수첩에 적어둔 영어 단어를 외웠다. 마음이 외롭거나 허전할 땐 키친핸드 마이클과 호주식 슬랭을 복습하며 놀았다.
함께 홀에서 일하는 그녀들은 나만의 방식으로 왕따를 시켰다. 하지만 어디에나 복병은 있는 법.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조식 셰프 준이 어이없는 이유로 내 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 괴팍한 게이 할배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냥 머나먼 '이국땅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라 마음 먹거리 했다. 마음속에선 '저 미친 ㅉㅂㄹ'가 올라왔지만 불쌍하다 마음먹으니 그가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4명을 제외하고는 호텔 식구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호텔 프론트 직원 칸도, 하우스키퍼 제니도, 런치 스텝 마리아와 토니도, 컨퍼런스 직원 티나도, 지배인 브라이언도, 키친 핸드 마이클도 모두가 친절했다. 지원군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한 거였다. 숨 쉴 구멍이 생기니 저들의 괴롭힘도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어느 날 컨퍼런스 매니저 티나가 물었다.
"김자까자까, 이번주 주말에 뭐 해? 혹시 시간 되면 컨퍼런스 뷔페 파트타임 일 해 볼래?"
이탈리아에서 호주로 이민온 티나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에 곱슬머리였는데 무척 매력적으로 생긴 40대 아주머니였다. 호텔에서 일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온 것이다. 위기속에도 기회는 생기고, 죽으란 법은 없었다.
그녀는 브라이언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일 시작하기 전날 메뉴판을 빌려가 메뉴를 외워온 이야기를 했다.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이런 수다쟁이 브라이언, 굿~잡~'
컨퍼런스는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많아서 조식 타임 레스토랑 알바를 마치고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시급도 무려 2불이나 더 많은 21불이었는데, 주말에는 시간당 23불인 꿀 알바였다. 나는 흔쾌히 한다고 했다. 이 날 이후 주말에 가끔 컨퍼런스 파트타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로이스 호텔 로비: 구글 이미지 참고
로이스 호텔 컨퍼런스 홀: 구글 이미지 참고
컨퍼런스 일은 간단했다. 호텔 2층에 큰 홀이 있는데, 동그란 6인 테이블을 줄 맞춰 펼치고 식탁보를 깔고 의자를 놓는다. 새하얀 코튼 테이블 메트를 각각 깔고 카트롤리와 와인잔, 물 잔을 세팅하면 된다. 벽면으로 뷔페 음식들이 세팅이 되고 접시와 집게들을 챙겨 놓는다. 음료와 차, 커피, 와인을 준비하면 손님들이 들어온다.
비즈니스 컨퍼런스일 때는 회의가 끝이 나면 음식을 먹었다. 파티가 있는 날엔 접시에 핑거푸드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권한다. 처음엔 너무도 어색했다.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스토랑과는 다르게 내가 음식을 들고 다가가 권해야 하는 부분이라 상당히 쑥스러웠다. 하지만 몇 번 해보니 금세 적응이 되었다. 손님들은 격식 있고 친절했다.
남들보다 영어를 못하니 일이라도 빠릿빠릿하게 했다. 혹시나 레스토랑에서처럼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일하는 내내 웃음꽃이 만발했다. 레스토랑에서는 쭈굴이였지만 이곳에선 나의 원래 성격이 거침없이 나왔다. 컨퍼런스 식구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트롤리에 접시들이 가득 차면 알아서 치웠다. 음식물을 더 이상 담을 공간이 부족해서 다들 우왕 좌왕 할 때 아이스 버킷을 비워 임시로 음식물을 담게 했다. 한쪽은 음식물, 한쪽은 음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면서 아이디어가 좋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컨퍼런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진짜 셰프들이 준비했다. 괴팍한 준은 조식이 끝이 나면 바로 퇴근했다. 친절한 호주 셰프들과의 소통은 나의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일이 끝나면 뷔페 음식을 포장용 플라스틱 통에 담아 가곤 했는데 저녁밥 한 끼 때우기 참 좋았다. 돈도 벌고, 일도 즐겁고, 저녁도 해결되는 1타 3피 컨퍼런스 아르바이트가 참 좋았다. 하지만 어쩌다 있는 일이기 때문에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는 계속 이어졌다.
"언니, 컨퍼런스에서 일한다면서요?"
웬일인지 다이엔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
"어떻게요?"
"티나가 주말 쉬프트 줬어"
입을 실룩 거리며 다음말을 우물쭈물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없는 다이엔. 왜 물어보는지 뻔했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도 않는 말에 굳이 더 보태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무시할 땐 언제고 어디서 날로 먹을라고. 무엇보다 컨퍼런스에서 만큼은 이들의 얼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컨퍼런스 직원 미아에게 들었는데 킴이 티나에게 컨퍼런스 일을 추가로 하고 싶다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티나는 "쉬프트 생기면 말해 줄게" 하고는 한 번도 킴을 찾지 않았다고.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는 몰랐다. 하긴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5시간 30분으로는 호주 살이가 만만치 않았을 테니 엑스트라 벌이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