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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아이 Oct 09. 2019

나는 이렇게 일본에 오게 되었다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짧은 인생 회고록


일본 효고현에 위치한 어느 공장 락커룸. 잔업 두 시간을 하고 나니 어느덧 하루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 것을 깨닫는다.


한국을 떠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고 조금은 심오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살아가게 될 인생에 관한 생각들을 시작하게 된 게. 먹고살기 바쁜데 뭔 느긋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내가 이십 대의 나이에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대학교 입시공부를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업하기 전까지.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겠으나 난 내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접어들 무렵 나는 운 좋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고 그 꿈은 내가 2년 동안 지치지 않고 대입 준비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결과적으로는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나는 지금도 가 바라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던 그 시절의 나를 좋아하고 또 감사한다. 아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그 정도로 많은 시간을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경험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꿈과 관련도 없어 보이는 공부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여기서 내가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감을 느끼는 크나큰 전제는 강제적이 아니라 자발적인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것을 주변 사람들로 인해 강제로 하게 된다면 그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무튼 그렇게 해서 목표와는 달랐지만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입생 때는 그 해방감에 너무나도 신나게 지낸 것 같다. 앞서 열심히 달렸다면서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부할 수 있다. 놀 때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는 것을 :)


2학년에 접어들고 후배님들이 생기자 또 내리사랑이라고 선배들께 얻어먹은 밥들을 되갚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왔다. 그래 핑계 맞다. 사실 더 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기 그지없지만 술 마시며 객기 부리는 게 어찌 그리 즐겁던지. 주변에 내가 마시니까 너도 마셔라고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던 선배 내지 동기가 있었다면 혹시 나일지도 모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2학기에 접어들자 이제까지 누려왔던 자유는 나중에 빅엿을 주기 위함이었던 건가 하고 느껴질 만큼 엄청 난 양의 과제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제대로 공부해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적응하기까지 깨나 애를 먹었다. 아니 결국 그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적응하지 못하고 유흥과 벼락 과제를 반복하며 힘겹게 2학년 2학기를 끝냈다.


방학 때마다 잠깐잠깐 해외여행을 가거나 동아리 대회를 준비하거나 면허를 따거나 뭘 한 가지씩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에는 교내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 보고자 한 달 바짝 토익학원을 다녔다. 토플을 따면 더 많은 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토익이 더 만만해 보였다고 할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바로 지원 가능 점수를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처참히 빗나간 채 마킹을 다 못 끝낸 채로 OMR카드를 제출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는 물 건너갔구나. 붙으면 바로 휴학 때리고 알바를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실전 연습이 부족했던 탓에 바보 같은 실수로 한 학기 연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훗날 이것은 정말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몸소 체감하게 해 주는데 휴학을 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우리 과 최악의 학기라고 불리어지는 3학년 1학기를 무사히 동기들과 수강할 수 있었고 수업은 빡셀지언정 버팀목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나았다는 것이다. 그 학기에 휴학을 해서 나중에 홀로 그 학기를 선후배 사이에서 지내야 했다면 물론 여차저차 가능은 하였겠지만 힘듦이 배가 되었을 것은 물 보듯 뻔다.


그렇게 3학년 1학기를 마치고서는 반년 후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쓸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도합 세 가지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절때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의 미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크고 작은 경험들 또한 크나큰 자산이다. 아르바이트 얘기는 세세히 설명하면 길어질 것 같기에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자 한다.


반학기 동안 휴학을 하며 돈을 번 후 3학년 2학기 나는 드디어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외국여행을 가본 적은 있으나 역시 몇 달간 체류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가기 전부터 느낌이 남달랐고 그곳에서 나는 내 대학생활 최고의 한 학기를 보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랑 교류하며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왔다. 무엇보다 나는 친구운이 좋은 것이 컸는데 그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일본에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 학기 동안의 꿈만 같던 교환학생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4학년 1학기를 지냈다. 한국에서의 대학교 생활이 행복에 겨웠던 건 아마도 2학년 초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소소한 즐거움을 찾자면 물론 여기저기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부터 전반적인 한 학기의 이미지는 시달림과 인내로 굳어져있었다.

교환학생 가기 전과 후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외국어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 영어는 더 이상 교과목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의사소통을 하게 해 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일본어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김에 방학이나 방과 후 등의 짬을 내 회화수업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졸업하고 대학원을 갈지 취업을 할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취업을 한다면 해외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4학년의 여름방학. 나는 일본어 회화수업 숙제로 써내던 자기소개서를 다듬어 한 일본의 회사에 제출하였고, 그 길로 일본에 오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지도 어느덧 일 년 하고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타지에서 일하는 국인 노동자로서 내가 이곳에서 깨닫고 느낀 것은 어쩌면 한국에서 20년 넘게 지내며 깨달은 것들과 동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에게 큰 영향을 줬다.


한국의 몇 안되는 행복한 20대로서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모를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내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 더 나아가 이 글을 읽고있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 모두의 행복이라는 소박하고도 원대한 바램을 담아 브런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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