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친하게 지내던 브라질 동료와 나 단 둘만이 버스 안에 타고 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 회사의 부당고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그 이야기. 외국인 직원을 고용할 때 엔지니어라고 직무를 속여서 채용한 후 실제로 입사 후에는 기약 없이 현장일만 시키는 우리 회사의 만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친구와 나는 각각 회사와 대화를 시도한 적도 있는데 돌아오는 답은 더 가관이었다. "속인 적 없다. 현장연수기간이 있다고 인터뷰 도중 설명을 하였고 그 기간에 대해서는 명시한 바가 없다. 아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수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뿐이다. 그게 싫다면 그만둬도 상관없다."
글쎄. 얼핏 보면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현 상황으로는 설령 현장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 능력을 갖춘다고 해도 그들이 다 현장에서 빠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장은 언제나 사람이 없어서 반강제로 잔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그들이 오기로 되어있던 생산기술 부서에는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다. 즉 일단 뽑아놓고 회사가 커지면서 필요하다면 한 명씩 이동시킬 계획인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될지 누가 될지 어떤 기준일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기약 없는 그날을 한 해 두 해 기다리다 그만둔 동료들도 있다.
정말 화가 나고 정 떨어지는 일이지만 다들그만두지 않고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메리트가 있어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브라질 친구는 회사가 애시당초 직원을 속여 데려온것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태였다.(이하는 브라질 친구 T군과 나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T: 지난번에 온 사람 오자마자 현장 배정이라는 말 듣고 울기 시작하더라.
나: 면접 때 또 말 안 해줬대? 물어보니까 면접 들어갔던 사람들은 말했다고 하고 그분은 못 들었다고 하니까 누구 말이 맞는 건지 원...
T:보나 마나 또 말 안 했겠지 뭐. 나도 그런 식으로 와서 1년 넘게 의미도 모르고 현장에서 일했었으니까.
나: 울정도라면 그만두고 돌아가는방법도 있지 않아?
T: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수 있는 게 아니잖아. 다들 여기 오기 전 자기 나라에서 하던일이라던지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온 건데.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일본 간다고 알린 것도 있을 거고 근데 그대로 돌아가기 힘들지 않겠어?
나: 힘들겠지. 하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체면을 위해서 생각에도 없었던 일을 계속하는 것보단 낫지않아? 지금 상황에 불만 있으면 뭐라도 해봐야지 불평만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잖아
T: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거야? 회사는 아무 잘못도 없고?
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 회사가 잘못 없다고 말한 적 없어. 잘못 누가 봐도 가장 잘못한 건 회사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인 이상 거기서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정하는 거 아니야?체면을 구기더라도 그만두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직무가 맘에 안 들더라도자국보다는 더 많이 벌 수 있으니까 몇년만 참고 일할 건지.다가질 수 없으면 어느쪽인가는 포기해야지.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니까.
심심풀이 땅콩으로 시작했던 대화가 여기까지 과열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 꺼내놓자고 생각했고 그다음에 친구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쳐주겠다는 기세였다. 친구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보이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T: ... 듣고 보니 그렇네 너 말이 맞다.
친구의 대답을 듣고 티는 안 냈지만 잠시벙찐상태가 되었다. 내 의견에 동의해줘서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주고받을 때, 언제나 이기려고 들었던 것 같다.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날의 대화에서 나는 그때까지의 내가 생각하던 "승리"를 맛보았으나 토론에 임하는 자세에서는 대패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기려고 든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주장을 하든 나는 내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고 그저 어떻게 설득할지만을 고민한다. 애초에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가? 상대방설득에 성공해 승리감을 맛보는 것? 그보다는 다양한 견해를 공유하고 양측모두 성장해가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친구에게 크게 한방 먹고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상대방이 내 의견을 들어주기를 원한다면 나부터도 들을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100%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