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할머니 할아버지께 종종 연락이 온다. 어김없이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랑 큰맘 먹고 헤어지라는 말씀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슬슬 지치고 짜증도 난다. 아니, 그전에 내가 섣불리 할머니 할아버지께 말씀드린 게 더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분은 내 걱정에 잠을 설치고 계신단다.
지금의 남자 친구는 전 회사의 동료였다. 일본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 만났고 일본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부터 할아버지는 마음에 안 드셨을 거다. 내가 일본 취업이 결정 났을 때부터 "일본 남자는 절대 안 된다."라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엄마마저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처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을 때, 잘됐다며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엄마는 나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바로 남자친구와 나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15살 차이의 국제연애. 그게 바로 나와 내 남자 친구가 주변 사람으로부터 맘 편히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15살 위의 아저씨랑 사귈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뿐더러 그렇다고 관리를 엄청 잘해서 동안인 사람도 아니었다. 딱 그 정도 나이로 보이는, 하지만 같이 대화할 때는 그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편한 직장 동료였다.
다른 동료들이 나랑 그분을 엮을 때면 솔직히 불쾌할 정도였다. '아니 양심이 있지. 자기 아들 딸이었어도 15살 위의 사람이랑 사귀라고 등 떠밀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차이 그 자체보다는 그 나이대로 보이기때문에 전혀 외적으로 끌리지 않았던 게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연인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제로로 생각한 채 심심하다는 이유로 종종 어울리고는 했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사귀는 사람도 없고 간단하게 식사 정도는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이었다. 혹시 도중에 대시해오면 그때 칼같이 끊으면 되고. 지금 써놓고 보니 거만해 보이지만 정말 그 정도로 가능성이 없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얘기를 거듭하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을 때 즐겁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남 욕 하는 것도 본적 없고, 무엇보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이었다. 둘이 만나는 게 편해질 무렵 곰곰이 생각해보니 외모와 나이 빼고는 정말 나에게 있어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반년을 함께한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연애는 상대방의 좋은 모습만 보고 한껏 불타오를 때 시작해서 서서히 식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깊어지는 연애를 하면서 어쩌면 이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내가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께 남자친구 얘기를 꺼낸 이유였다.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안 되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그럴듯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지금 나이로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시선으로 답을 해주셨다.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몇 년 차이로 확확 늙고 병들어간다고 하셨다. 실제로 아는 지인이 10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남편이 빨리 늙어 혼자 일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몇십 년 후에 그렇게 되었을 때 병시중을 들며 고생할 내 생각을 해서 반대하고 계신 것이었다. 역시 바라보는 기간의 기준이 다르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나 잘되라고 해주시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할머니 세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기에 육체적 노동이 중요시되었고 신체적 노화로 인해서 잃는 것이 지금보다 더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몸을 쓰지 않고도 일을 하고 즐길 수 있는 수단이 많이 생겼으며 상황에 맞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오래 놓고 본다면 수명도 걱정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이고 운 나쁘면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
사실 어른들의 말이 와 닿지 않은 무엇보다 큰 이유는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일에 대한 걱정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른들 말씀대로 노년기에 접어들면 누군가는 먼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할 테고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같이 반평생 함께해온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당장 그 처지에 놓이지 않아 가볍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로 인해 함께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생각했지만 결혼 전에 헤어질지도 모르고 결혼을 했어도 서로 맞지 않아서 도중에 이혼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 글을 보면서 피식하고 웃게 되겠지. 하지만 연상연하 커플 반대에 대한 할머니의 묵직한 한방은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새로운 시각을 알려주신 할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