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실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5개월 전, 크로아티아 실연박물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무한도전 <나쁜 기억 지우개> 편이 방송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쁜 기억을 토해내고 지우개로 지워갔다.
거짓말처럼 기억을 지워버리고 이불킥을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실연 당했어.”
연애의 종지부를 흔히 실연이라 말한다. 잃을 실, 그리워할 련. 소중한 인연의 상실은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가지의 이별을 여러 번 경험한다. 반려견의 죽음, 학창시절 교복과의 작별, 가족과의 사별처럼. 꽃이 피면 지듯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별은 우리를 서툴게 만든다. 기억에 남아 여전히 슬프다.
공동 디렉터 올링카 비스티카와 드라젠 그루비시치
크로아티아 : 자그레브 실연 박물관
실연박물관은 크로아티아의 2006년 두 아티스트 올링카 비스티카와 드라젠 그루비시치에 의해서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으로 처음 시작된 전시이다.
공동 디렉터인 두 사람은 과거 연인 사이였다. 헤어진 이후 함께 소유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자 시작했던 생각을 발전 시키면서 친구들의 사연까지 모았다. 크로아티아의 한 아트쇼 프로젝트는 실연박물관이 되었다.
그들은 각각의 물건 자체를 작품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예술이 맞다고 밝혔다. 2010년에는 자그레브에 상설 박물관을 열어 현재까지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파리, 런던, 샌프란시스코 등 세계 22개국 35개 도시에서 순회전시를 가지면서 현재 1,000여점이 넘는 물품과 사연을 소장하게 되었다. 나라마다 실연의 이야기에는 저마다 향수가 녹아있다.
이 두 사람은 사랑이나 삶에 회의적이 되지는 않았을까.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사실, 그 반대”라고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는데 실연도 인생의 그런 사건이죠. 우리가 사랑을 하고 그것을 잃는다는 것을 통해 인생의 일부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Ⅱ
제주 :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은 제주 구도심의 부흥을 재현시키기 위해 폐관된 극장에서 예술공간으로 탄생했다. 과거의 흔적이 녹아든 문화의 탄생지에서 이번 전시는 더욱 뜻깊다. 한국에서 기증 받은 80여개의 사연과 물품 외에도 크로아티아 박물관의 세계 각국 소장품들을 선보였다.
가까운 인간관계부터 제주 4·3 사건 등 사회적인 이슈까지 실연의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이 되었다.
2층에서 5층까지 ‘사랑의 위성’, ‘그대여, 안녕’, ‘가지않은 길’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술을 물어뜯는 여자친구를 위한 ‘롤리팝 사탕에 붙은 메모’, 무심코 조각 후 버렸던 흙의 소중함 ‘풍경이 말해준 것’, 40년 전 제주의 모습을 담은 ‘바다 넘어’ 사진, 전 여자친구의 오른쪽 어깨 X-ray ‘얄팍한 못된 년’까지 다양하다.
박물관에서 제공해주는 ridibooks로 사연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9월 25일(일)까지 아시아 단독으로 전시가 개최된다. 사연을 나누면서 완성되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전시는 관람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있다
지난 4월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에서는 어른과 아이들을 위한 미술 테라피가 이루어졌다.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에서는 6월 18일 ‘X의 유물경매’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실연을 위로하는 소장품 경매도 열렸다.
예전 추억을 의미하는 X. 사연이 담긴 물건들은 경매 게임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고, 경매 수익금은 ‘제주몽생이그룹홈’ 아이들의 위로가 되었다.
5층의 실연 방명록에는 저마다의 실연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읽는 동안 문득 생각해봤다. 내겐 나 자신에게조차 떳떳이 공개할 수 있는 ‘X의 유물’이 없다.
그들에게 헤어진 인연은 더 이상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 기억을 깊은 곳에 간직해두었다가 추억이 될 때 진심으로 꺼내어 볼 수 있었던 사연자들이 부러웠다.
우리는 헤어짐 때문에 사랑을 다시 시작하지 못해선 안된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시간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끼는 데에도 충분하다. 책 [그리움은 모두 북유럽에서 왔다]의 한 구절처럼 모든 게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 꼭 사랑이 되어야 전부인 것도 아니다.
삶은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저 좋았던 기억들로 남을 수 있도록 놓아 두었다가 때가 되면 서랍 속에 보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 X의 유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