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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물골 여관길의 갤러리,
'2016 제주아트페어'

by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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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물골이 흐르는 길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덕선이의 쌍문동처럼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추억의 동네가 있다. 내겐 제주시 관덕로가 그랬다. 2016년 지금, 기억 속에 담아 두었던 동네가 ‘샛물골 여관길’로 다시 찾아왔다.


조그마한 샛길에서 물이 나는 곳, 제주시 동문로터리와 산지천에 접한 ‘관덕로 15길’은 ‘샛물골’이라고 불린다. 제주 최대 규모 동문시장에서 칠성통 옛 극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주도 최고의 번화가였다. 과거 항공이 아닌 선박을 이용해 관광객들이 제주를 찾아오면서 샛물골 일대 가장 성행했던 사업은 단연 숙박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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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 자리에서 과거를 지키는 낡은 간판들, 옛 여관에서 아기자기한 게스트하우스로 변한 곳들. 15년 만에 찾은 샛물골은 방문객들의 하루를 포근하게 재워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샛물골 여관 길은 2016 제주아트페어를 통해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최근, 예술은 갤러리 밖을 벗어나 호텔 등 숙박 공간이나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친숙한 공간을 활용한 전시는 각 객실마다 어떤 예술을 품고 있는지 궁금증을 선물한다. 12월 16일 개최 예정인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외에도 광주, 대구 등 전국적으로 객실 전시가 선행하고 있다. 지자체 주최로 진행되는 아트 페어는 지역 고유의 색깔을 나타내는 콘셉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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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서 그림보기, ‘2016 제주아트페어’


올해 3회를 맞은 ‘제주아트페어’는 지난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샛물골 여관길 일대에서 열렸다. 57명의 아시아 작가들은(국내 41명, 중국·일본·태국 16명) ‘다양동일(多樣同一)’이라는 주제처럼 여관 네 곳을 다양한 작품들로 채웠다.


비 내리는 금요일 아침, 나는 제주아트페어로 향했다.


공간 1. 옐로우 게스트하우스

과거 정의원(병원)에서 경도 여관으로 바뀐 곳이다. 현재는 게스트 하우스로 젊은 여행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온 옐로우 게스트하우스에는 트렌디한 작품들이 입구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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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2년 동안의 방글라데시 해외봉사 활동을 기록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낮은 눈높이의 전시가 인상 깊었다. 목을 길게 빼고 사진을 눈으로 훑는 것 대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사진 속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맑은 아이들의 눈망울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공간 2. 대동호텔

1971년 객실 9개의 대동 여관에서 시작해 지금은 34개의 지점을 가진 대동호텔로 성장했다. 건물의 오랜 역사를 담듯, 작품들 역시 고풍스러운 멋이 특징적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작품은 501호와 305호에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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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는 모리카와 히로타카의 전시 공간이었다. 일본의 전통이 느껴지는 화려한 채색과 생동감 있는 선, 터치에 눈이 즐거웠다. 추상화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물의 잔상을 찾을 수 있다. 나무와 꽃의 형태를 단순화한 변형은 그만의 오묘한 작품세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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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의 전실이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욕실’이라는 공간 때문이다. 옻칠과 나전이라는 전통적인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액자로 전시된 작품은 타월 벽에 걸려있었다. 전시효과를 더한 조명, 램프와 욕실의 습한 분위기는 절제된 작품을 한층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공간 3. 더 포레스트 게스트하우스

제주 최초로 방 안에 화장실이 있던 과거 옥림 여관에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게스트하우스로 변모했다. 더 포레스트 게스트하우스에는 아기자기한 작품들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진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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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구석에 송유진 작가의 귀여운 점토 인형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제목이 [어디 놨더라? #책상 밑]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책상 밑으로 내렸더니 귀여운 그림 하나가 숨어 있어서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넘어간 옆방 203호에서는 김유진 작가의 흑백 하늘 사진을 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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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4. 동성장

근처 대동 여관과 옥림 여관 투숙 관광객들에게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한 유미 식당은 1982년 숙박업소인 동성장으로 변했다. 동성장의 201호의 첫인상은 여미지 식물원과 닮아있었다. 진짜 식물과 그림 식물이 한 캔버스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콜라주 작업 방식으로 앞에 있는 식물들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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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모관

숙박 건물을 활용한 전시 외에도 ‘인포라운지’에서 볼 수 있는 중국 작가들의 작품, 제주 해녀 기획전 ‘비아아트’, 작품 구매 및 경품 이벤트도 있었다. 건물을 옮겨가는 재미가 있었다. 전봇대에 매달려 흩날리는 안내판은 흐린 금요일 거리 속 네온사인 같았다. 비가 내려 괜스레 추적거리던 마음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제주 원도심이 쉼터가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원도심 재생 사업 [오래된 미래, 모관]이 있다. 옛 제주성 안의 지명인 ‘모관’을 딴 프로젝트는 ‘원도심 성굽길 답사’에서 시작되었다. 원도심 지역을 대표하는 관덕정 광장을 중심으로 오현단, 산지천까지 역사문화자원의 활성화뿐 아니라 원도심 지역특성에 맞는 도시 환경 및 상권화 발전을 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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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청년들의 활발한 움직임도 보인다. ‘일로와 제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제주의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오프라인 활동도 진행 중이다.


일할 곳이 없어서 허덕이는 청춘들을 위해 사무실을 공유하는 ‘플레이스 일로와’, 뮤지션이 꿈인 친구들을 위한 작은 콘서트 ‘바람 콘서트’, 창업에 뛰어든 청년 창업가들의 네트워크 ‘제주청년창업협동조합’ 등 2030세대를 주체로 남녀노소 제한 없이 모두가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샛물골 여관길에서 시작되는 과거 제주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동문로타리, 중앙로, 관덕정 일대는 예술이 있는 문화마당으로 재탄생한다. 제주 프린지페스티벌, 제주아트페어, 프랑스영화제, 작은 플리마켓인 호쏠장(‘호쏠’은 제주어로 잠깐이라는 뜻이다.) 등 다양한 행사도 진행 중이다.


오래된 모관 속에서 제주 원도심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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