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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나는 제주에 있었네

신천리와 하도리의 이야기

by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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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제대로 알기까지

아찔한 여름이다. 6층 우리 집 남쪽 바다에서 찾아오는 바람은 숨구멍이 되어준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나는 베란다에 몸을 맡겼다. SNS에 업로드된 사진들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뉴스피드는 여행 사진들로 가득했다. 통과의례처럼 친구들은 모두 방학 동안 여행을 떠났다. 20대 내 동지들은 어떤 나라, 어느 계절에서 각자의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젊음이 무기고 여행이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나도 있었다. 대학생이라면 한 번은 가야 하는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외경심’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떠올리게 될 줄 몰랐다. 순천만 정상에서 본 일몰은 너무 예뻐서 무서웠다. 아기자기한 제주와는 다른 자연을 접한 게 처음이라 넓은 순천만을 만났을 때 아찔했다. 일몰로 빨갛게 타는 하늘도 겁났다.


웃기게도 나는, 내일로 여행을 마친 뒤에야 내가 사는 제주를 오롯이 느낄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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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의 성지가 되었다. 시내 이곳저곳에서 셀카봉을 든 백패커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어딘가 천편일률적이다. 같은 필터, 비슷한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인터넷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애월읍과 월정리의 유명 ‘카페 관광’으로 전락한 것 같아 아쉽다. 사진만을 위한 여행에는 놓치고 가는 것들이 있다.


23년 제주산 뿌리를 가진 나도 너무 늦게 알았다. 제주의 낮은 마을에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소박한 멋이 있다. 많은 사람이 숨어있는 제주를 알고 함께 숨쉬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올해 여름, 제주에 있기로 결심한다. 뙤약볕에 살이 타들어 가는 8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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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동쪽에는 내가 좋아하는 마을 두 곳이 있다. ‘신천리’와 ‘하도리’는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신천리가 초록빛을 띈다면 하도리는 푸른색을 품고 있다.


고요한 벽화 마을, 신천리


성산읍 서쪽 마을 신천리는 고요하다. 음식점, 카페를 찾아보기 힘들어 외지인들의 발길이 적다. 큰 나무가 없어 길가에 그늘이 없다. 돌담 너머 있는 밭과 과일나무들은 햇빛에 그대로 몸을 맡긴다. 녹음의 빛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수국이 활짝 핀 마을 입구를 지나면 동화 속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마을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돌담도 동화같은 분위기를 더해준다. 해녀복을 입은 어딘가 이질적인 아프로디테부터 네모네모 스펀지밥, 고흐의 그림부터 팝아트까지. 신천리를 걷다 보면 시공간을 초월한 벽화 친구들이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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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리는 2013년 여름, 화가로 성장하는 탈북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선샤인(Sunshine)]의 촬영지였다. 제작진은 한 달의 촬영 기간 동안 마을에 팝아트 풍의 벽화 9점을 남겼는데 이것이 시작이었다. 젊은 예술인들까지 힘을 더하면서 제주특별자치도 지원 아래 ‘바람코지’ 신천아트빌리지 조성사업이 시작됐다.


벽화가 시작되는 마을회관을 지나 어촌계 마을 너머에는 푸른 바다와 넓은 들판이 보인다. 제주도의 각 마을에는 수호신을 섬기는 본향당이 있다. 신천리는 본향당이 바닷가에 있는 것을 보면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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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맞닿은 해안 마을은 신천신풍목장이라는 바다목장도 만들어냈다. 하나의 길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남해상사 신천목장, 우측에는 신풍목장이 있다. 여름에는 말과 소가 성장하고 겨울에는 넓은 대지에서 귤껍질이 몸을 말린다. 겨울의 주황빛 바다가 기대된다.


나는 신천리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도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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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와 포구가 숨 쉬는 하도리

구좌읍에 위치한 하도리는 푸르다. 하도리에는 마음이 뻥 뚫리는 전경이 있다. 해안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왼편 포구에는 ‘Hado’라는 조형물이 보인다. 그대로 시선을 오른쪽으로 두면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이 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경은 장관이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하도리 해변과 알록달록한 지붕을 가진 집들의 모습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성벽을 지나 마을 어귀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있다. 열어놓은 대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할머니들의 제주어가 정겹다. 동네 슈퍼를 지키는 강아지 짱구도 당신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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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서 대하겠다”

하도리는 역사가 숨쉬는 마을이다. 제주에서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이기도 하며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본인들의 수탈은 악랄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지정한 일본인들에게만 판매하도록 했다. 1931년 1월 7일. 하도리가 술렁였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1000여 명 해녀의 손에는 호미와 빗창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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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했던 성벽은 ‘별방진’이라 불린다. 고려 삼별초군의 항몽의지가 담긴 애월읍 항파두리 외에도, 나라를 지키려는 노력은 제주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 하도의 별방진에도 그 마음이 서려 있다.


제주에는 고려 때부터 동부와 서부해안에 석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9진이 있다. 별방진은 그중 하나로 조선시대 때 김령읍에서 옮겨졌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을 생각하면 별방진은 하도리를 지키기 위한 든든한 장군이었을 것이다.


하도 어촌체험마을과 철새도래지에서는 제주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물질 체험부터 해안가의 불턱(불쑥 튀어 나온 언덕)에는 해녀들의 숨이 느껴진다. 드넓은 연안습지가 발달한 하도리는 북쪽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 갈대밭이 발달해있다. 겨울이 되면 30종 3,000여 마리의 철새가 하도리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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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바다를 만나서

제주에서의 대학생활이 답답한 적도 있었다.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회의 기준이 성공의 전부인 줄 알았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내게 중요한 척도였다. 서울이 별천지처럼 느껴져서 휴학하고 상경해서 지내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계획 하나 없었던 여정은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었다.


제주는 그런 나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 어떤 작은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어영 해안도로 위를 지키던 별빛은 나를 위로해줬고, 절물휴양림의 울창한 삼나무 숲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줬다.


여전히 우리 집 뒤편에선 바닷냄새 나는 바람이 불어오고, 앞쪽 창문에선 한라산을 버팀목 삼아 열심히 장사를 하는 ‘삼춘’들도 보인다. 이곳엔 소중히 기억해야 할 것들도 넘쳐나고 더 알아가고 싶은 것도 많다.


내게는 여전히 제주가 별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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