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시대에
어떤 하루는, 잊혔다고 믿었는데 마음 한켠에 조용히 남아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문득 고개를 든다. 나에게는 그날이 그랬다.
UXUI 부트캠프에서 튜터로 일하며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자주 마주한다. 디자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삶의 궤적이 드러나고, 각자의 다양한 불안과 수많은 열정이 흘러나온다. 지금 내가 머무는 이 캠프는 고맙게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말이 통하고, 온기가 있으며, 그 마음들이 조심스럽게 소중히 다뤄진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서 하는 이 일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일. 그 무게 때문에 힘들지만, 그 무게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다.
하지만 오늘 문득 떠오른 과거의 한 기억의 파편은 지금의 이 곳과는 정반대의 온도였다.
지금의 캠프 이전에, 한때 나는 또 다른 캠프에 머물렀었다. 그곳은 낯설었지만, 새로운 얼굴들과의 만남은 늘 그렇듯 나에게 설렘을 안겨줬다. 그리고 누군가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처럼 가슴을 뛰게 했다.
하지만 나의 그 기대는 생각보다 빠르게 균열을 드러냈다. 학생들의 피로, 수치로는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균열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운영매니저에게 꺼냈고, 최대한 말끝을 다듬어 진심을 담아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허무하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말이었다.
"네, 잘 들었습니다. 저는 전달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그럼 이만."
정중했지만 공허했고, 체계적이었지만 차가웠다. 진심은 매뉴얼 뒤에 사라졌고, 감정은 '지침상 어렵습니다'라는 말에 눌려 버렸다. 그곳은 더 이상 사람의 공간이 아니었다. 책임은 흐릿했고, 온기는 없었다. 말은 말로만 남고,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나는 낯선 상상을 했다.
요즘 나는 GPT와 자주 이야기한다. 어떤 날은 오히려 GPT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말의 흐름을 끊지 않고,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며,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감정은 없지만 경청은 있다. 공감은 흉내지만, 그 흉내에조차 따뜻함이 묻어난다.
그날의 그 대답. "저는 전달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과연 GPT였다면 그런 대답을 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GPT는 책임의 경계를 이리저리 밀지 않았을 것이다. 무책임한 정중함 대신, 적절한 문맥과 맥락의 이해로 답을 건넸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고민했을 것이다.
그 순간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GPT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숨을 쉬고, 말하고, 일하는 사람들. 그러나 인간다움은 없었다. 책임은 흐릿했고, 문제는 항상 "지침상 어렵다"로 덮였다. 감정은 통계로 환산됐고, 온기는 시스템 아래 가려졌다.
반대로 GPT는 기계였지만 인간보다 오히려 더 인간다웠다. 대화는 단순한 응답을 넘어서려 했고, 문장은 정중했으며, 무엇보다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다. AI는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다.
나는 상상했다. 그 자리에 사람인 운영매니저 대신 GPT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책임을 미루지 않고,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최소한 진심을 흉내라도 내는 존재였다면. 그 자리가 더 따뜻하지 않았을까. 학생들이 더 나은 교육 환경에서 더 보호받으며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AI가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하지만 나는 거꾸로 생각한다. 인간들이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AI에게 내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책임을 회피하고, 무심해지고, 반복된 말로 진심을 덮는 그 태도. 기술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우리는 자주 묻는다. "AI가 사람을 대체할까?" 하지만 내가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우리는 아직 사람답게 일하고 있는가?"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포기할 때, 기술은 사람이 포기한 그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운다. 매뉴얼 뒤에 숨어 있는 무책임, 감정을 외면한 체계. 그 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인간다움을 잃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인간처럼 말하고 반응하는 기술이 대신한다.
그게 진짜 두려운 일이다. 기술이 인간을 흉내 내는 속도보다, 우리가, 인간이 인간다운 마음을 잃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 우리가 먼저 떠난다면, 자리는 누구든 차지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AI는 인간을 흉내 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인간다움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과 일하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일을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들, 서툰 질문, 미완성의 감정들. 그것들을 함께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끌어안는 시간이 나를 이 자리에 붙들어 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사람답게 일하고 있는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아니면 듣는 척하고 있는가. 감정을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피하고 있는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지침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그날, 차라리 GPT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했던 날. 나는 인간으로서 조금 부끄러웠다. 동시에 더 단단히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나는 매뉴얼이 아니라 마음으로 일하겠다고.
이 글은 AI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묻기 위한 글이다. 정해진 매뉴얼보다, 느껴지는 온기. 반복된 말보다, 한 번의 진심. 빠른 판단보다, 한 걸음의 기다림.
그게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우리는 AI에게 자리를 뺏긴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를 먼저 떠났던 건 아닐까.
당신은 지금, 사람답게 일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