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디자인 대신 생각을 정리했다

장표를 만들지 않기로 한 날, 내가 만든 건 생각의 여백이었다

by 디자이너 야니

UXUI캠프에서 수강생 친구들이 제출한 과제 피드백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노션에는 빼곡히 적은 피드백 내용들이 쌓여갔다.
전하려는 내용은 분명했지만, 그걸 어떻게 정리해서 보여줘야 할지에서 다시 발이 묶였다.


‘이걸 PPT로 만들까, 아니면 피그마로 정리할까?’


둘 다 익숙한 도구였지만, 생각만 해도 손이 무거웠다.
디자인은 시간이 든다.
디자이너인 나조차도, 아니 어쩌면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무언가를 “보기 좋게” 만든다는 건, 단순히 예쁜 화면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니까.
정보를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 여백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색의 농도와 무게, 리듬까지

디자인은 늘 감각과 구조를 동시에 다룬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게 다 피곤하게 느껴졌다.
전달하고 싶은 말은 이미 정리되었는데,
그걸 장표로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정리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래서, 장표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깔끔하게 페이지로 만들어줘


대신 나는 제미나이에게 말을 걸었다.


스크린샷 2025-08-13 오후 7.16.16.png 제미나이 화면


“이 내용을 깔끔하게 페이지로 만들어줘.”


명령어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정리된 내용을 복사해서 붙여 넣고, 단락 구조만 간단히 나눠준 다음 그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제미나이는 바로 HTML 코드를 짜주었다.
가독성 좋은 타이포그래피, 단정한 간격, 색상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대로 복사해 HTML 파일로 열어보니, 내가 직접 디자인하지 않아도 되는

가독성 좋은 한 페이지가 완성되어 있었다.


스크린샷 2025-08-13 오후 7.25.16.png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웹페이지 (수정없는 1차 초안 상태)


순간, 조금 놀랐다.
물론 AI가 코딩을 해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달을 위한 가독성’까지 알아서 판단해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과물이 “내가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을 줬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감각을 대신하는 도구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다.
색을 고르고, 여백을 조절하고, 폰트를 정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건 작업이라기보다 어떤 감각의 연장선에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에 그 감각을 쏟을 수는 없다.
특히 피드백을 정리한다든가, 내용을 빠르게 공유해야 할 때,
디자인은 오히려 ‘딜레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날처럼, 감각을 AI에게 잠시 맡긴다는 선택은 게으름이 아니라 리듬 조절에 가까웠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하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어디에 집중하고, 어디는 흘려보낼지를 아는 감각 아닐까.


제미나이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다.
내 생각은 내가 정리하고, 표현은 도구에게 맡기는 방식.
감각을 내어주는 대신, 시간과 몰입을 돌려받는 경험.


이건 효율이라기보다는 여백을 확보하는 방식에 더 가까웠다.

불필요한 뇌의 에너지를 덜어내고, 전달에 필요한 최소한의 형태만 남기는 것.
그건 일종의 ‘디자이너다운 미니멀리즘’이었다.



시간을 아낀 게 아니라, 감정을 지킬 수 있었다


요즘의 나는 ‘효율’이라는 말보다 ‘여백’이라는 단어가 더 좋아졌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려는 것보다, 할 필요 없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게 더 어렵고 멋지다고 느낀다.


AI는 내 일을 대신해주었다기보다, 내 감정을 보호해주었다.
애써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고, 그 시간에 나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내가 기대하던 기술의 역할이었다.

차갑게 정리하는 손이 아니라, 내 마음을 흩뜨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어떤 손길.



나는 앞으로도 디자이너일 것이다


AI가 코드를 써주고, 페이지를 만들어주고, 타이포그래피를 자동으로 정리해주더라도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로 살아갈 것이다.


그 이유는,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구조가 읽기 좋은지, 어떤 간격이 말의 여운을 잘 살려주는지, 어떤 순서로 보여줄 때 마음이 덜 흔들리는지를 아는 사람.


디자인은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려 깊은 눈과, 감정을 지키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장표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어, 이거 직접 디자인 안 했어?"
"그럼 어떻게 정리한 거야?"


그럴 때 나는 웃으며 말할 것이다.


“응, 나는 내용만 정리했어. 대신, 감정은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아놨어.”


그날,
직접 디자인 된 장표 대신 AI에게 부탁해서 웹 페이지를 만든 건

시간을 아낀 게 아니라, 나를 덜 지치게 하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선택을 점점 더 자주 하게 될 것이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내 안에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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