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아직 '직접' 해야만 한다고 믿는가

AI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by 디자이너 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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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님, 과제 진행 할 때 AI 써도 돼요?"


캠프에서 과제를 내주고 있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AEIOU 작성과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HMW를 활용해서 문제정의와 솔루션을 도출하는 과제였다.

조금은 복잡하고, 시간이 꽤 소요되는 작업이기도 했다.


"물론 활용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꼭 본인이 직접 검증은 해봐야 해요."

내 대답을 들은 학생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되물었다.


"근데 그러면 과제가 너무 쉬워지는 거 아니에요?"

그 순간 나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과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거지, '과제를 어렵게' 하기 위해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왔다.

애초에 일이라는 건 어렵게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고생한 시간'과 '노력의 크기'로만 성과를 재단하기 시작했다.






수고롭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


디자인 일을 시작하고, AI가 점점 일상적인 툴로 들어오면서부터 나에겐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

툴이 나 대신 초안을 짜주고, 자동으로 구조를 정리해줄 때면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이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걸까?"
"내가 뭔가를 '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AI를 활용하면, 시간이 단축되고, 결과물은 빨라지고, 아이디어는 훨씬 다양해진다.

그런데도, AI에 기대는 내가 어딘가 부정직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내가 스스로의 노력을 생략한 사람처럼, 혹은 미숙한 디자이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되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것을 대체한 걸까?
일의 본질을 대체한 걸까, 아니면 불필요한 수고로움을 덜어낸 걸까?"



디자이너의 본질은 변하고 있는가


예전엔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하나를 만드는 데도 긴 시간을 쏟아야 했다.

노트를 펼쳐놓고, 포스트잇을 일일이 오려내어 붙이고, 옮기고, 그룹핑하고,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 시간 속에는 집중, 몰입, 직관이 있었고, 때로는 혼란과 인내도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는 빠르게 패턴을 분석하고, 유사한 데이터를 묶어 제안한다.

그 정확도는 점점 높아지고, 감각적으로도 세련돼진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하던 일을 AI가 대신하게 되는 이 시대에, 디자이너의 '역량'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빠르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깊이 바라보는 능력'으로. '무엇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가'로. 그리고 '혼자 해내는 힘'이 아니라, '함께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감각'으로.


우리는 지금, 디자이너라는 정의가 다시 써지고 있는 과도기에 서 있다.



프롬프트는 디자이너의 또 다른 언어


KakaoTalk_Photo_2025-08-08-09-42-46.jpeg 2024년 AI 트렌드 책 일부


『2024년 AI 트렌드』에는 미래의 인간은 '지시하고 검증하는 역할'만 남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무가 AI에 의해 대체될 거라는 예측이 이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미 그런 미래의 단면들을 보고 있다. 다양한 산업군에서, AI는 단순 반복 업무나 정형화된 분석은 물론이고, 이제는 의료 영상 판독, 법률 서류 검토, 금융 리스크 진단, 고객 응대, 콘텐츠 추천 등까지도 빠르게 대체해가고 있다. 영상 편집, 카피라이팅, 마케팅 자동화까지, 우리가 '사람의 직감이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왔던 업무조차 AI가 수행 가능한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이미 이 변화는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 예측이 공상이나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언제나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빠르게, 더 깊게 우리의 삶을 바꿔왔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기술을 다룬 사람'이 아니라, '기술 너머의 사람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AI를 사용하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묻고, 어디서 멈추고,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이다. 나에게 프롬프트는 단순한 명령어가 아니다. 프롬프트는 내 시선이고, 감각이고, 철학이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가치에 반응하는지를 드러내는 디자이너의 언어이자 태도다.



살아남는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앞으로 살아남을 디자이너는 도구를 완벽히 다루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AI가 제안한 수많은 안 중에서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한 진짜 디자인인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 기계의 언어로 생성된 결과물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고, 다시 다듬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여전히 ‘문제 해결’이 아닌, '사람과의 연결'로 바라보는 사람. 나는 그런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AI가 짜준 흐름을 내 손으로 다시 써보고, AI가 만든 초안을 다시 지우고, 내 리듬으로 다시 정돈해본다. 그래서 더 느리게, 그러나 더 내 안에 깊게 닿는 방식으로.






감각을 지키는 일


그날 학생이 던진 말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럼 과제가 너무 쉬워지잖아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지만, 어쩌면 정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쉬운 것'과 '좋은 것'을 혼동하고, '편리함'과 '의미'를 때때로 서로 반대편에 두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것은 수고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피어나는 몰입과 감각, 그리고 연결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감각은, 도구가 바뀌어도, 시대가 변해도, 디자이너라면 결코 놓을 수 없는 본질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직접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 감각을 지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묻고, 다듬고, 의심하며 한 줄의 디자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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