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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1. 2019

여자 높이뛰기에 출전한 남자, 도라 라트젠

낯선 그녀들의 역사 #2. 1936 베를린 올림픽의 여장남자 운동선수

1938년 9월 21일. 비엔나에서 쾰른으로 넘어가는 기차에서 역무원은 다소 어색한 차림의 여성을 발견한다. 회색빛 투피스와 살색 스타킹 그리고 살짝 낮은 굽의 하이힐. 영락없는 여성의 옷차림이었지만 단발에 가려진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남성이었다. 의심을 감출 수 없었던 그는 경찰에 신고한다. 


기차가 마그데부르크(Magdeburg) 역에 멈추자 그녀는 플랫폼에 잠시 내려서 그간의 여정에 찌뿌둥한 듯 스트레칭을 한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찰나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했다. 당황한 기색의 그녀는 어제 열렸던 유럽선수권 대회 ID를 내밀었다. 신분증을 내민 손에서 경찰관은 수많은 '털'들을 발견한다. 의문을 자아내는 그녀의 안면과 털들. 결국 그녀는 경찰서로 향해야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부터 높이뛰기 선수로 활약했던 도라 라트젠(Dora Ratjen)의 사기행각이 드러날 순간이었다.

면도와 다리털 밀기가 일상이던 여고생

비단 이상한 일들은 이 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18년 도라, 아니 하인리히가 태어날 때부터 그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안겨주었다. 브레멘 근처의 평범한 가정에서 그가 태어나자 산파는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이라고 알렸다. 그러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그녀는 딸이 태어났다며 번복했다. 부모는 산파의 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딸로 받아들였다. 당시 섹스나 성과 관련된 담론은 금기시 된 주제였기에 그 후로 자식의 성별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9개월 후, '도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에게 다시금 성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온다. 도라가 흉막염과 폐렴을 동시에 앓자 의사가 그를 진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아버지가 의사에게 그의 성에 대해서 묻자 의사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 가정에는 이미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부모는 네 자식들을 모두 딸이라 여기며 동등하게 키웠다. 도라는 이따금씩 자신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가졌다. 비록 그는 여자 옷을 입고 컸지만 사춘기가 되자 남성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점차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부모님에게 왜 자신을 딸로 키웠는 지는 묻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를 딸로 키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여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남성적 특징을 숨겨야만 했다. 


도라는 공놀이를 취미로 하는 평범한 여학생으로 자랐다. 여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학생으로 지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과 같은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 도라는 차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다리털을 밀어야 했으며 면도도 해야 했다. 스포츠를 좋아해서 브레멘에 있는 스포츠 클럽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수영은 멀리했다. 춤추는 것도 그녀의 취미는 아니었다. 쉬쉬했던 그의 비밀이 들통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담배공장에서 포장하는 일을 시작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1.55m를 뛰어넘는데 성공한 도라
도라, 여자높이뛰기 선수가 되다!

도라에게도 한 가지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높이뛰기였다. 15세 때부터 이 분야에 두각을 드러낸 그는 1934년 지역 챔피언이 되면서 베를린 올림픽에 나갈 인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남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당대 여성 운동선수들은 남자처럼 보이는 경우가 흔했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두고 남자같다며 놀리기도 했다. 


그렇게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다가왔다. 이 때 독일 출신의 유능한 여성 높이뛰기 선수들은 많았다. 유태인 출신 그레텔 베르그만(Gretel Bergmann)은 1.60m를 뛰어 금메달을 안겨줄 1순위 후보로 부상해 있었고, 그 뒤를 엘프리데 카운(Elfriede Kaun)이 바짝 쫓고 있었다. 도라는 3순위였다. 이들은 함께 대회에 출전하고 합숙을 하며 올림픽을 준비했다. 도라는 3순위 선수였지만 나치 치하는 그에게 행운을 안겨주었다. 그레텔에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었지만 독일 스포츠당국은 유태인의 활약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 도라를 올림픽 출전 선수로 선발한 것이었다. 룸메이트로 같이 올림픽을 준비했던 그들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렸다. 


한편 올림픽 메달권은 1.60m였다. 도라는 아쉽게 이 높이를 넘지 못해 4위에 머물렀다. 금메달은 헝가리, 은메달은 영국 그리고 동메달은 동료인 독일의 엘프리데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 18살. 어렸던 도라에겐 성장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체포되기 직전 비엔나에서 있었던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는 1.70m를 넘으며 세계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대회 바로 전에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던 베를린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던 영국의 에이미는 자신의 기록이 남자같이 생긴, 괴이한 성격의 독일 선수에게 뺏겼다는 소릴 들어야만 했다. 화가 난 그녀는 남자같이 생긴 애가 자신의 기록을 빼앗았다며 폭주하기도 했다.


도라, 그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간성(Intersex)

허나 도라의 여자로서의 삶은 세계신기록을 세운 그 다음 곧바로 무너졌다. 기차역에서 경찰서로 끌려온 도라. 경찰관은 그녀에게 진짜 정체를 밝히라고 엄포를 놓았다. 도라는 마지막으로 저항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경찰관은 그녀의 죄에 공무집행방해죄가 더해질 것이라 했다. 체념한 도라는 그녀가 남자라고 밝혔다. 19살의 도라는 그렇게 체포되었고, 머그샷을 찍어야 했다. 죄목은 사기. 남자임에도 여자행세를 한 죄였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외과의사가 불러져 도라의 몸을 조사했다. 판명은 당연히 남자. 그러나 의사는 도라의 생식기가 단순히 남자의 그것이 아니라 간성, 즉 완벽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인터섹스(Intersex)라는 소견을 덧붙였다. 이후 스포츠센터에서 몇 가지 조사가 더 있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3월 도라는 금전적인 목적으로 여성 운동선수가 된 것이 아니기에 사기죄가 성립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여성으로서 스포츠 경기에 나설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도라의 사기죄로 자신의 재산이 넘어갈까 전전긍긍했던 도라의 부모는 법원에 보낸 편지 끝자락에 "하일 히틀러"라 적으며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라의 세계신기록은 일전의 에이미에게로 넘어갔다. 도라가 남자라는 사실은 급속히 스포츠당국으로 전해져 기록이 삭제된 것이다. 


순식간에 남자가 되어버린 도라. 주변의 충격은 컸다. 그와 룸메이트 생활을 했던 그레텔은 도라가 운동선수면서도 다른 선수들과는 절대로 같이 샤워를 하지 않았던 친구였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다고 인터뷰했다. 특히 그녀는 도라가 있어 올림픽 출전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그가 남자라는 뉴스기사를 접하자 실성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도라 측에서 거부했다고. 동메달리스트였던 엘프리데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올림픽을 준비했기에 도라가 남자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여자로서 경기를 펼치고 있는 도라

하인리히로서의 도라의 삶은 평범했다. 경찰조사에서 남자로 밝혀진 게 오히려 속시원하다고 한 그였다. 하노버에서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은 하인리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하시던 술집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2008년 죽을 때까지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의 속마음을 밝히길 거부했다. 한 번은 타임지에서 그의 고향 웨이터와 인터뷰 기사를 발표했다. 하인리히가 울면서 그 웨이터에게 올림픽 출전이 나치의 압박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것. 그러나 이 타임지의 기사는 정설이라기 보단 하나의 음모론으로 취급받았다.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베를린 36>에선 타임지의 기사처럼 그가 나치의 압력으로 여장을 한 것으로 비춰지나 하인리히의 독특한 생식기 구조와 성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던 풍토가 낳은 드라마 같은 이야기라는 게 아직은 정설이다.


참고,


(기사)

Stefan Berg(September 19, 2009) How Dora the Man Competed in the Woman's High Jump. Spiegel Online

BBC(September 9, 2009) The Jewish jumper and the male impostor. BBC News

Mike Henson(August 11, 2016) Sex and Gender in Hitler's Shadow: Dora Ratjen and the 1936 Olympics. Vice Sports.


(인터넷)

Rarehistoricalphotos. Dora Ratjen, a German Olympic athlete, who was arrested at a train station on suspicion of being a man in a dress, 1938 https://rarehistoricalphotos.com/dora-ratjen-german-olympic-athlete-arrested-train-station-suspicion-man-dress-1938/


(학술논문)

Vanessa Heggie(2010) Testing sex and gender in sports; reinventing, reimagining and reconstructing histories. Endeavour Volume 34, Issue 4, pages 157-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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