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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1. 2019

남북전쟁 유일의 민간인 희생자, 마리 지니 웨이드

낯선 그녀들의 역사 #3. 남북전쟁 희생자에 대한 기록

1863년 미국 펜실베니아의 게티즈버그. 한산했던 이 마을은 남북전쟁에서 가장 피 말리는 전투로 꼽히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한창이었다. 마을에 있던 주민들은 군인들의 설득으로 피난을 갔지만 일부는 집에 남아있었다. 치열한 양상 속에 유탄들은 마을 이곳저곳을 날아다녔고, 벽들은 총탄으로 구멍이 뚫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남군의 저격수가 쏜 총알 한 방이 어느 집 안으로 날라들었다. 탄환은 빵을 구울 채비를 하던 여인의 어깨를 관통했고, 그녀는 즉사했다. 그녀는 5만 여명의 사상자를 낸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죽은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죽은 유일한 민간인 마리의 하나뿐인 사진
마리, 남북전쟁의 한복판에 휘말리다 

마리 지니 웨이드(Mary V. "Ginnie" Wade)는 1843년 재단사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신적으로 문제를 자주 일으켰던 아버지는 법을 어기는 행태를 왕왕 보였고 결국 구빈원(The Poorhouse)에 구금된다. 조그만 마을에서 이상을 보이는 아버지. 덕택에 지니네 가족은 사회적인 평판이 안좋았다. 위로는 언니 조지아가 있었고, 밑으로는 남동생들인 존, 사무엘, 해리가 있었다. 지니는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어머니의 재봉 일을 거들었다. 이것만으론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어지자 이삭이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기도 했다. 이외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발발한 1864년 7월 1일. 지니는 엄마와 남동생들 그리고 그들이 돌보는 이삭과 함께 언니 조지아의 집으로 피난을 간다. 조지아의 집 역시 게티즈버그에 자리 잡았지만 외곽에 위치했기에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덤으로 조지아가 출산을 한 지 5일밖에 지나지 않았아 산후 조리도 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그날 오후 남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언덕에 자리 잡았고, 조지아의 집은 북군과 남군의 전장 한가운데에 휘말리게 됐다.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
북군을 돕기 위해 빵을 굽던 지니

지니는 겁없이 밖을 돌아다니며 북군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했다. 펜실베니아의 게티즈버그는 북군을 지지하여 마을에서도 북군에 지원했던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북군이 집으로 찾아와 도망가라고 재촉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조지아를 배려하고자 가족들은 남는 걸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총탄은 마을 곳곳을 날아다녔다. 창문이 깨지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 수류탄이 조지아의 집 지붕으로 들어와 벽돌 사이에 박혔다. 다행히 터지지는 않고, 15년 후에 발견된다. 그럼에도 지니는 전장을 누비며 북군에게 빵을 구워다 주고, 언니 조지아를 돌봤다. 전투 마지막날에도 아침 일찍 지니는 밖에서 동생과 함께 불을 지필 장작을 모아올 정도로 활발했다. 


그러나 총탄은 점점 지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니가 머무르던 집으로 찾아와 갓 태어난 아들과 누워있던 조지아의 침대 모서리에 박히기까지 했다. 당돌한 지니는 괘념치 않고 북군들에게 나눠줄 빵을 굽기위해 반죽을 만들었다. 한창 반죽이 무르익었을 때쯤 남군 저격수가 쏜 탄환 하나가 조지아의 집에 날아 들었다. 2개의 문을 뚫은 총알은 그녀의 왼쪽 어깨를 뚫고 심장을 관통했다. 지니는 즉사했다.

조지아와 그녀의 28살 연상 친구 마리아 그리고 지니

조지아의 비명이 집안을 울렸다. 소리를 들은 북군은 집으로 들어와 나머지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지하실로 안내된 그들은 남부 저격수로부터 지니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날 남군은 버지니아로 후퇴했다. 전해지는 말로는 지니가 만들던 도우는 어머니가 완성하여 북군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한편 지니의 주머니 속에선 잭 스켈리(Johnston "Jack" Skelly)라는 청년의 사진이 발견됐다. 당시 잭과 지니는 결혼을 약속한 것으로 보였다. 잭은 지니가 죽기 몇 주 전,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윈체스터 전투(The Second Battle of Winchester)에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니가 총탄으로 쓰러진지 몰랐던 그는 그녀가 죽은 지 10일도 채 안되서 지니의 곁으로 간다. 잭의 동료였던 웨슬리 컬프(Wesley Culp)가 잭의 위급한 소식을 지니에게 전달하기 위한 부탁을 받았으나 그 역시 남북전쟁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 지니는 조지아의 집 근처에 묻혔다. 80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전투에서 단 한 명의 민간인만이 사망하자 언론에서는 지니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의 평판이 안좋았기에 전장에서 북군을 도왔던 지니의 진정성이 의심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그녀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북군을 돕기 위해 빵을 나눠주던 따듯한 마음을 지닌 정석적인 여인으로 평가받았다. 곧이어 지니의 순간을 다룬 서적이 출간됐으며, 그녀가 죽은 조지아의 집은 관광명소로 부상됐다. 20살 어린 나이에 전투 속에서 죽은 평범한 여인은 이제는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 고스트 하우스 명소, 제니 웨이드 하우스


19세기 당시 언론사의 착각으로 지니 웨이드는 제니 웨이드(Jenny Wade)로 잘못 알려졌다. 그렇기에 그녀가 사망한 장소는 제니 웨이드 하우스(Jenny Wade House)라는 이름의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게 된다. 처음 사람들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사망한 지니를 기리기 위해 주로 찾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지금은 고스트 투어의 명소로써 사랑받고 있다.



지니의 죽음으로 명소가 된 제니 웨이드 하우스는 유령이 출몰하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의외로 제니 웨이드 하우스에 나타나는 귀신은 지니가 아니다. 근처에 고아원이 있어서 그곳 아이들이 조지아의 집으로 왕왕 놀러오곤 했는데, 그들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하여튼 지금은 게티즈버그의 중심가에 위치한 이곳에 방문하게 되면 저절로 불이 꺼지거나 아이들의 말장난이 들리곤 한다. 때로는 남북전쟁 당시의 발포소리가 울리기도 한다고. 이렇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지금은 펜실베니아 지역 고스트 투어의 중심부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지니 웨이드를 기리는 기념품과 남북전쟁 관련 자료들도 접할 수 있다. 




참고,

(인터넷)

Jennie Wade House 메인사이트. http://www.jennie-wade-house.com/


(기사)

Remembering the Only Civilian to Die at Gettysburg, Jesse Greenspan(History, 2013)

The Tragedy of Jennie Wade, NJ Historian(Thehistorygir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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