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던 남자> 그리고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이 세상의 비밀을 알려드릴까요? 우리는 단지 이 세상의 뒷모습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모든 것은 뒤에서 보고 있고, 그것은 짐승처럼 보이죠.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뒷모습을, 구름이 아니라 구름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겁니다. (p.194)
런던 레스터 광장의 한 구석엔 호화롭지만 조용한 호텔이 하나 있다. 파리식 창문을 자랑하는 2층엔 카페가 하나 있고, 그곳의 넉넉한 발코니는 광장을 향해 튀어나왔다. 발코니 대부분을 차지하는 테이블 곁에는 신사들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파도처럼 울려 퍼졌다. 대화 주제는 어떻게 왕을 죽일 것인가. 넉살 좋은 신사들의 치기 어린 주제는 호기심을 자아내기보다는 허풍으로 들렸다. 웨이터는 잔인한 계획을 들으면서도 웃어넘겼다. 반면, 주인공인 가브리엘 사임은 파르르 떨리는 마음새를 애써 감춘 채 동석해야 했다. 런던 경찰국 형사인 그가 무정부주의자들의 간부회의에 참석한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간부들은 일주일로 구성돼 있다. 대장인 일요일은 거대한 덩치에 백발을 자랑한다. 한눈에 봐도 거인인 그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더라는 타이틀까지 걸어두니 금방 질겁의 대상이 된다. 다른 멤버들 역시 호러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유독 한쪽 얼굴만이 일그러진 간사, 금방 숨을 멈추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노교수, 일요일에 만만찮은 풍채를 자랑하는 후작, 털로 뒤덮인 폴란드인 그리고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져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법한 시선을 가진 의사가 그들이다. 사임은 형사임을 들키지 않은 채로, 이들의 작전에 훼방을 놓아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이 모든 혼란을 겪은 후에는 누가 아군이고 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성격이 생겼다. 겉모습과 다른 무엇이 존재했는가? 후작은 코를 떼어내고 나서 형제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이번엔 얼굴을 벗어버리고 악마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혼란스러운 숲처럼 모든 것이 어둠과 빛의 뒤범벅은 아닐까? 모든 것은 단지 한 순간에 포착된 인상이고 그것은 항상 예측할 수 없고 잊힌다. (p.146)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이 쓴 <목요일이었던 남자>의 가브리엘 사임은 험악한 인상과 무정부주의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들을 추적한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알 수 없지만, 무지막지한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 표독스러운 얼굴과 파괴적인 발상은 주인공을 막연함이란 수렁으로 이끈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된 가면들은 글이 전개될수록 하나씩 벗겨진다. 프랑스 왕을 죽이기 위해 모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실은 테러를 막기 위해 위장한 런던 경찰국 형사들이었으며, 이들을 모은 경찰국의 수수께끼 인물은 일요일이던 것이다. 결국, 무성한 추측과 공포감을 낳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은 어느새 무정부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형사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 돼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를 표방한 형사들이 서로를 쫓고 쫓기는 모습은 반전을 선사하기도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서로를 아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그간의 경험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외면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대화로써 상대방의 내면을 토해내게 하지만 그것으로 상대방을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누구보다 사악한 시선을 가졌던 의사가 안경을 벗자 소년의 눈망울을 드러냈듯이, 슬쩍 겉모습을 내벗어 던지기만 해도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게 인간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로 귀결되지 않나 싶다. 얼핏 보기엔 심오함을 곁들인 철학적 질문인 듯싶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저 내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면 된다. 함께했던 순간들, 대화들, 인상들의 결합체로써 그에 대해 아는 바를 표현하면 된다. 그러나 경계해야 될 게 있다. 표현은 하되, 규정지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가정, 또래, 특정 집단 사이에서 새로이 적응할 때마다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관계들 사이에서 다져진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맞이할 때마다 유약해진다. 하지만 그 새로운 관계 속 자아도 시간을 통해 다시금 단단해진다. 그렇게 빚어진 페르소나들은 각각의 집단에서 다른 양상을 띄고, 각각의 페르소나에서도 상황에 따라 여러 행위들을 양산해낸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어떠한가. 수많은 시간과 관계가 축적된 시선들은 다른 이에 대해 각각이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할 순 있지만, 안다고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다. 언제라도 상대방이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일요일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네요. 각자 일요일을 다르게 묘사했지만, 여러분은 모두 그를 우주와 비교했어요 (p. 192)
한없이 무섭게 보였던 일요일.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저마다 일요일의 모습이 험상궂다고 평하며, 두려운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금세 변한다. 소년을 닮은 의사는 일요일이 자신들을 피해 코끼리를 타고 겅중겅중 도망 다니자 일요일을 좋아하게 됐다는 표현(p.189)까지 한다. 그러자 저마다 일요일에 대한 색다른 인상을 내놓는다. 봄날, 태양, 무성한 숲, 변화하는 광경....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저마다 일요일을 다르게 바라봤고, 사임은 그것들이 우주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우리를 구성한 총체지만, 매일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상으로 말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체스터턴은 당대 유행했던 무정부주의에서 비롯한 비관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람들에게 낙천적인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적으로 생각되었던 사람들이 우군으로 드러났듯이, 세상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우호적이라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p.218)라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 악한 것만은 없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험악한 인상들이 주변에 있을 법한 얼굴들로 바뀌는 사건들과 일요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로 이어진다는 사실로 방증할 수 있다.
이처럼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보여줄 수도, 남을 볼 수도 있는 세상이다. 무엇이든 가변적이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언정, 확정지어선 안 된다. 내가 누군가를 서로 다르게 대하듯, 누군가도 나를 그만의 방식으로 대하고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