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차가 놓인 지 얼마 안 된 일본의 시골 마을. 겨울은 폭설이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내리면, 겨우 놓은 발자국들이 종종걸음으로 쫓아온다. 아이들은 제 몸만 한 얼음을 겨우 들어 떨어뜨린다. 부서지는 얼음 조각들이 반사된 햇빛에 반짝이면, 곁을 둘러싼 아이들이 좋아라 박수를 친다. 중학생들은 학교 2층에서 높다랗게 쌓인 눈 위로 몸을 던진다. 푹- 빠지는 포만감도 잠시 차가운 눈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창백해진 몸을 벌벌 떨며 냉큼 학교로 들어간다. 눈으로 온 동네가 칠해진 시골 마을. 그곳으로 들어서는 기차역에 도쿄의 시마무라가 발을 들인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부모님이 남긴 돈으로 호의호식한다. 경제 활동을 따로 할 필요 없으며, 도쿄에 아이들이 있음에도 자유롭게 여행을 즐긴다. 상업용이 아닌 책을 쓰기도 한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서양 무용. 그 개념이 익숙지 않던 20세기 초 일본에서 자비를 들여 출간하려고 한다. 또한, 그는 정기적으로 설국을 닮은 시골 마을을 찾는다. 거기엔 시마무라에 호감을 갖는 게이샤 고마코가 있다.
간진초가 끝나자 시마무라는 겨우 숨을 돌리고 아아, 이 여자는 내게 반했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또한 처량했다. (p. 64)
시골 마을이 눈으로 채워지듯, 시마무라의 마음도 눈으로 채워진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 눈처럼 소복이 그의 마음에 쌓인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을 달구면 오히려 눈은 녹는다. 금세 공허해진다. 그래서인지 고마코의 애정표현은 시마무라에게 처량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가끔씩 찾는 시골 마을 게이샤와 자신이 이뤄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마코 역시 드러내 놓고 표현은 않지만 그걸 알고 있다. 덧없는 미래로 향하는 사랑은 처량할 뿐이다.
시마무라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게 고마코라면, 그가 슬며시 관심을 갖는 여자도 있다. 요코다. 요코는 그가 시골로 가는 열차에서 마주친 여자다. 요코는 종종 등장하며 시마무라의 관심을 산다. 얼마 못 가 죽은 청년의 애인이었던 요코를 보며 헛수고란 단어를 떠올리기도. 요코는 시마무라를 봐도 별 말을 않고, 고마코의 편지를 전할 땐 무릎을 꿇고 전달할 정도로 거리를 둔다. 그러나 둘의 마주침은 빈번해지고, 요코가 그에게 가정부로서 도쿄에 데려가 달라고 갑작스러운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p. 95)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속으로 일축한다. 곰 따위는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으로 그 관능이 인간과는 다르다. 시마무라는 사랑의 시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사랑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다 요코가 사고를 당한다. 고치 창고에서 영화를 상영하던 날, 화재가 났다.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지켜보는 앞에서 요코는 2층 관람석에서 추락한다.
사람은 허약했다. 요코는 죽진 않겠지만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죽을 날만 앞둔 남자를 보살핀 요코와 고마코의 노력을 헛수고라 일갈했듯, 요코에 대한 은근한 관심 역시 허사가 됐다. 시마무라가 부축을 받는 요코 곁으로 다가서다 밀려나자, 쏟아지는 은하수가 시마무라에게 쏴- 하고 흘러 들어온다.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갈 때부터 눈에 띄던 은하수다. 하늘에 퍼진 은하수는 시마무라를 껴안을 듯 황홀경을 자아내는데, 은연한 존재감을 발하던 요코는 허약한 존재로서 쓰러져 있을 뿐이다.
요코에 대한 시마무라의 감정은 제대로 품기도 전에 녹았다. 아마 시마무라는 사랑의 덧없음을 다시금 깨달았으리라. 사람에 대한 감정을 눈으로 품었던 시마무라. 그것이 데워질 때면 마음은 오히려 공허해진다. 죽은 청년을 향한 여인들의 마음도, 고마코와의 감정도, 요코를 향한 관심도. 다 덧없다.
눈이 풍경을 가득 채운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인간은 허약했고, 사랑은 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