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에고 Sep 16. 2019

편견이란 기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그리고 박상영

생각보다 기대는 무서운 단어다. 마땅히 따라야 할 것 같다.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나와 너 사이에 억지로 엉겨 붙어 있다. 수틀리면 괜히 그 관계까지 뒤틀릴 것만 같아, 알게 모르게 따르곤 한다. 그래서인지 혹은 본디 그렇게 태어나서인지 남에게 암묵적인 기대를 하곤 했다. 어제는 무표정한 아줌마를 위해 하나로마트 출입문을 잡았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지나쳤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광대만이라도 슬며시 올려 줄 순 없는 걸까. 곧 그 찰나를 내가 순수한 의도로 한 것이라 합리화했다. 내가 원했다면 최소한 당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모순은 슬쩍 숨긴 채.  


순간적인 기대는 그래도 쉽사리 지울 수 있다. 그렇지만 기대가 쌓이고 쌓여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지면 일반화되기 십상이다. 편견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여자라면 당연히, 남자라면 으레 그래야 한다는 건 현재 진행형으로써 투쟁 중이다. 그러나 그것 참 어렵다. 내 마음속에서도 편견이란 놈을 대상으로 수시로 파업이 열리곤 하지만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오픈 마인드를 지녔다고 떠벌리면서도, 이런 갈등을 품을 때면 그래도 되나 싶다. 속에 삼키더라도 괜히 미안해진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술 마시고 섹스만 했다 하면 무조건 홍상수 아류이기까지 한 것이고. (전자책 ver. p.245 이하 전부 전자책 ver.)


박상영은 그 지점을 세게 꼬집는다. 우리는 남녀만 프레이밍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 하면 미디어에서 보편적으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이 있다. 특정 연예인이 그 상징이 되기도 하고, 고운 몸선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디에서는 특정 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문란한 생활을 즐기는 모습으로 그린다. 조각조각 이미지들은 내면화되어 그런 흔적들을 흘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끼워 맞춰진다. 짠, 완성이다. 그들에 따르면,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그 만능 퍼즐에 속하게 된다.


특정집단에게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잘 좀 한다 싶으면 제2의 박지성, 제2의 김연아가 꼬리표처럼 붙는다. 그가 보유한 스킬이나 가치관은 썩 중요치 않다. 그저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와 닿도록 대충 세컨드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누군가에겐 영광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무언가로 비쳐서 판단하려는 걸까. 



내 영화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저 자신에 취해 있었을 뿐.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p.284)


주인공은 일상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들로 영화를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해마다 인물만 바꿔 개봉하는 멜로 영화처럼 그렸으리라. 그러나 그건 기대에 어긋난 영화다. 영화제 관계자는 보통 동성애자라면 하는 연애들이 있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찐 동성애자(성적 지향성에 찐이고 짭이고가 있겠냐만은)인 그는 화가 나지만 어찌할 수 없다. 심사위원도, 대중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깐. 퍼즐엔 다른 조각이 들어갈 공간이 없으니깐.


이렇게 편견이란 기대에 의문을 품을 때면, 한 번쯤 궁금해지는 게 있다. 편견이 그렇게 나쁜가. 내 생각 하나하나를 일일이 통제해야 한다는 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를 왜 막으려고 하는 거지. 편견이란 딱지를 붙이며 일반화하는 사람도 모순 아닌가. 직접적인 피해만 안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프랑수아즈 사강 누나도 그랬잖아.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tmi. 사강 누나는 마약을 두고 한 말이라는 데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편견은 피해다. 함부로 남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이에 어긋날 때 괜히 실망을 안긴다. 짜증을 일으킨다. 곧잘 드러내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건가 보다. 앞서 마트에서 내가 문을 잡아준 아줌마에게 나도 모르게 실망한 것처럼 우리는 은연중에 그것을 표현할 욕구를 가진다. 자기도 모르게 드러낼 수도 있다. 내가 만약 그걸 아줌마에게 표출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문 잡아주고, 화내는 괴상한 양상이 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동성끼리 손 잡고 걷는 것만 봐도 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제2의 김연아가 무너지면 함부로 존함을 들먹인다며 비웃는다. 제대로 된 상황 파악 능력을 상실한 채, 함부로 덧칠한다. 피해는 오롯이 상대방의 몫이다.


해결방안은 간단하다. 기대를 품지 않는 거다. 어렵다면 품기만 하면 된다. 품 밖으로 꺼내지만 않으면 우리는 서로 불편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염두할 것은 기대를 품지 않는 게 품은 기대를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애당초 논란거리를 던진 사람이 잘못이라고 한다. 아니다. 거기에 앞서 기울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크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부당하단 소릴 들어선 안 된다. 우리는 그 부당함을 제대로 곱씹어야 한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p.296)


함부로 기대하지 않는 삶은 참 어렵다. 어떻게 보면 불가능하다. 대신 하나 더 기억하는 건 어떨까. 내가 가진 기대가 누군가에게 험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편견들이 전할 폭력과 허탈감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하지 않아도 돼. 너도, 나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