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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ug 26. 2019

완벽하지 않아도 돼. 너도, 나도

<써밍 업> 그리고 서머싯 몸

엄마는 늘 완벽해 보였다. 적어도 어린이였던 나에게는. 엄마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능수능란하게 답했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어쩌면 적절한 통제도 한몫했으리라. 나이가 어리면 몸에 안 좋다는 말로 커피를, 폭력적 성향이 드러난다고 해서 컴퓨터 사용에 제재를 가했다. 막무가내로 억압한 것은 아니었다. 상장을 받아 오거나, 문제집을 금방 끝내면 야채부락리를 한 시간 더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들을 가볍게 지휘하는 엄마가 완벽해 보였다. 어른이 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완벽한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적이라 감히 말은 못 하겠다. 가정이라면 한 번쯤은 겪을 수밖에 없는 경제권, 건강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일들이었다. 차근차근 균열이 일어난 지점에서 엄마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엄마만이 아니었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막내딸이자 언니들과 팔짱을 끼고 서울을 거닐던 한 개인이었다. 겉으론 완벽해 보여도 속으론 고민과 고민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정답을 알려줄 것이란 기대를 지우고, 있는 그대로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전에 다 컸다는 생각에, 이때까지 씌우던 가림막들을 나 몰래 하나하나 지우던 그녀가 있었겠지만.



누구나 완벽을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실수하지 않고, 깔끔하게. 하지만 대문호 서머싯 몸은 그런 삶은 없다고 단언한다. 소설 <달과 6펜스>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명성과 부를 거머쥔 그조차도 자신은 글쓰기에 어려움을 늘 겪었다는 고백과 함께.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된 페이지를 써본 적이 거의 없으며 불만족스러워서 그냥 내팽개친 페이지가 훨씬 많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문장을 더 좋게 만들 수가 없었다. (...) 그리하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 않는다. 대신 내가 쓸 수 있는 대로 쓴다. (전자책 ver. p.82. 이하 모두 전자책 ver.)


서머싯 몸이 쓴 일련의 소설들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그리고 <인생의 굴레에서>까지 읽으며, 어떻게 그가 통찰력 있게 세상을 그려내고, 흡입력 있는 글자들을 나열했는지 궁금했다. 신이 있다면 뭇사람들이 가지지 못할 활자 제조 능력을 그에게 몰아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초로에 이르렀을 때 되돌아본 인생, <써밍 업>은 마냥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재능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 역시 좋은 글을 쓰지 못함에 두려워했고,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내가 보기에 아름다움은 높은 산의 꼭대기다. 거기에 올라가면 그다음에는 다시 내려오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다. 완벽은 약간 따분하다. 우리 모두가 목표로 삼는 그 완벽이 약간 모자라는 상태로 성취되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은 인생의 대표적인 아이러니다. (p. 537)


서머싯 몸 역시 글쓰기 능력을 계시받은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좋은 글은 필사하고, 서머싯 몸이 보기에 완벽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물어도 봤던 것.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 자기 단련에 열심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화려한 문체로 명성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 곧 잊힌 작가들을 떠올렸으며, 세상을 비출만한 글을 썼지만 알려지지 않고 떠난 작가들을 기억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성공은 어차피 운이다. 자기와 어울리는 것을 취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그려나가는 것. 완벽함에 얽매여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 즉, "각자가 자기의 본성과 본업에 알맞게 행동하는 바로 그것(p. 557)"이다. 아무리 잘나도 운이 없다고 잘 안 풀리는 게 인생이라면, 자기만의 색채를 가지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항시 품는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엄마를 완벽한 사람이라 맹목적으로 믿어왔던 것처럼, 한편으로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다고 혹은 완벽한 행동을 하길 기대한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일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아르바이트나 대외활동을 추천해줬다. 친구도 기쁜 마음으로 달력에 적고, 카톡에 메모했지만 듣는 건 그 순간뿐이었다. 길을 묻길래 알려줬음에도 따라주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에게 어차피 알려줘도 안 할 거잖아라고 따졌다. 친구는 슬며시 동의하면서 말했다. 나는 네가 아니잖아. 친구에게 필요한 건 공감이고, 친구여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단정 지었던 것이다.


지레짐작의 대가로 나는 친구에게서 잠시 실망을 느꼈었지만, 이면을 보니 내 욕심이 지나쳤다. 서머싯 몸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남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남들이 당신에게 잘해주면 고마워해야겠지만 잘해주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p.110). 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이 있는 만큼, 상대방도 그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기준이 있으며, 누구나 다 같은 경험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니깐. 인간은 무슨 말을 하든 결국에는 그들 자신의 감각과 일치하는 감각만을 승인(p. 137)하니깐.




젊은 왕이 있었다. 완벽한 통치자를 꿈꾸던 그는 뛰어난 학자들을 모아 지혜를 쌓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전부 구해오라고 명령했다. 30년 후 학자들은 수 백 권의 책을 구해왔다. 그러나 왕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이번엔 책들을 요약하라 명했다. 20년 후 학자는 책 10권 분량으로 줄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없었다. 학자들은 10권을 다시 줄여야 했다. 10년 후 책을 1권으로 줄이자 왕은 너무 늙어 죽기 직전이었다. 그러자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한 줄로 압축했다. "인간은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그러다 죽는다." (p. 485-486 참고로 각색)


서머싯 몸이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써밍 업>만이 아니라 <면도날>에도 소개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머싯 몸에 따르면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그가 태어났든 태어나지 않았든, 그가 살아있든, 살아있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없다(p. 458). 혹자는 자신이 독특하면서 특혜를 받는 존재라고 본능적으로 생각(p.110)하기에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머글이며, 이번 생일만 지나면 하늘에서 오토바이를 탄 거인이 우리 집 마당으로 날아 들어올 거라 기대했다.  


이뤄지지 않은 상상들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인생을 관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어차피 인간은 죽을 존재이기에 오롯이 자신만의 삶을 살면 된다. 간단하다. 전지전능할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 완벽하게 비칠 필요도 없으며, 그들에게서 그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는 본성을 그저 따르면 된다.


서머싯 몸은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p.524).

아침의 아름다움과 정오의 광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저녁의 평온함을 물리치기 위해 커튼을 내리고 전등을 켜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루를 주도하는 아침과 오후만이 아니라 끝자락을 마주해야 하는 저녁마저도 소중하다. 그 시간에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있으니깐. 우리의 인생이 허망하고 의미 없을지라도 그 순간들 중에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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