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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13. 2020

헨리 키신저와 베트남 전쟁: 정의냐 질서냐

<Kissinger's Shadow> 그리고 그렉 그렌딘

If I had to choose between justice and disorder, on the one hand, and injustice and order, on the other, I would always choose the latter. (p.37)


정의(justice)냐 질서(order)냐.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당연히 질서를 택하겠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란 평가를 받는 미국의 전 국가안보보좌관이자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말했다. 그가 미국의 외교를 전두 지휘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집권기인 1960년대 후반, 소련과의 냉전이 치열하던 시점이었다. 세계를 둘러싸고 소련과 힘겨루기를 하던 키신저는 도덕, 윤리, 인권을 중시하는 정의보다 자유 질서(Liberal Order)를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인 질서를 지지했다.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그의 사상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건실하길 바랐고, 그에게 정의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뒤처짐을 의미했다.


현실주의st로 하버드 대학 시절부터 꽃핀 그 발상은 닉슨 집권기에 국가안보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or)에 오르면서 흐드러진다. 20세기 중후반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베트남 전쟁에서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만이 아니라 캄보디아, 라오스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명했다. 미국식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이러한 키신저식 세계질서는 그렉 그렌딘(Greg Grandin)이 베트남 전쟁 위주로 키신저에 대해 쓴 <Kissinger's Shadow: The Long Reach of America's Most Controversial Statesman>이란 책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책의 중심이 되는 닉슨 집권기의 베트남 전쟁에 들어가기 앞서 전반적인 베트남 전쟁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성이 있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베트남은 프랑스 수중에 있었다. 베트남 건국 아버지 호찌민은 독립운동을 위해 프랑스에 저항했고, 공산주의자임을 숨겨 미국의 도움을 얻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호찌민은 베트남 북부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부였다. 이때, 남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는 프랑스가 강세였고, 베트남은 갈라진다. 호찌민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써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베트남을 얻을 뻔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베트남을 장악하여, 그 영향력을 동남아시아 전반으로 뻗칠 것을 염려한 미국이 프랑스와 바통 터치를 한다. 호찌민을 대표로 한 북베트남은 베트남을 통일시키기 위해, 미국은 공산주의로부터 동남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선에 뛰어든다.


남베트남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군 지휘관을 보내는 정도에 그쳤던 미국의 지원은, 북베트남군의 강세가 이어지자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어진다.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로 인해 그 내막이 밝혀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발생한 이유다.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인다. 단기간 내에 미국의 승리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쉬이 그치지 않았다. 5년이 넘도록 전쟁이 이어지자 일부 미국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미국과 전혀 상관없는 땅에서 자신들의 젊은이들이 죽어간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이에 미국은 반으로 갈라졌다.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은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동시에 낯선 땅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은 주마다 수 백 명에 달했다. 이와 같이 베트남 전쟁이 치열할 때,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과 키신저는 베트남을 주무를 자리에 오른다.




It wasn't war that was to be avoided but war fought without a clear political objective. (p. 22)


먼저, 헨리 키신저의 베트남 전쟁을 '정의'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그에게 있어 목적 없는 전쟁은 피해야 한다. 반대로, 정치적 목적이 있다면 전쟁은 언제든지 낙관할만하다. 전쟁 확대도 불사할 수 있다. 실제로 키신저는 전쟁에서 점진적으로 발을 빼겠다는 정부의 표면적인 입장과 달리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은근히 전쟁을 확대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전쟁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는 걸 막고, 정치권에서 시간이 걸리는 의견 수렴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자신이 세운 전략을 효율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 정의는 어떻게 보면 정책 수립 과정에서부터 없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닉슨은 백악관에 들어서면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베트남 파견군의 감축을 선언한다. 이를 위해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와 북베트남 정부와의 협상을 진행한다. 베트남화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함께 맞서던 전쟁에서 미국이 지원한 물자, 훈련 등으로 체계가 잡힌 남베트남군 위주의 전쟁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꾸겠다는 계획이다. 동시에 헨리 키신저는 프랑스 지인들을 전령 삼아 북베트남의 레득토(Le Duc Tho)와 협상에 나선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띠우(Nguyễn Văn Thiệu) 정권이 남베트남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해 난항을 겪는다. 협상이 진척되지 못한 가운데, 희생되는 미군의 숫자는 늘어갔다.


미군이 북베트남에 밀리진 않았다. 다만, 습한 기후와 정글을 이용한 북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통해 치고 빠지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또한, 그들은 캄보디아-라오스 국경을 타고 호찌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통해 군수 물자를 이동시킴으로써 미군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에 닉슨 정권은 결단을 내린다. 북베트남과의 협상이 원활하게 만들 한 타가 필요했다. 그들은 국회나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캄보디아-라오스의 땅인 호찌민 트레일에 비행 폭격을 가했다. 가뜩이나 베트남전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베트남전을 확대시키는 걸 알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책의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전쟁 확대는 부작용을 낳았다. 주목할 것은 캄보디아 킬링필드다. 미국이 캄보디아의 호찌민 트레일에 폭격을 가하자,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캄보디아 국왕은 미국과 단교를 선언한다. 이에 친미 성향의 군부 세력인 론 놀(Lon Nol)이 쿠데타를 일으켜, 캄보디아를 장악한다. 이에 시아누크 국왕은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Khmer Rouge)와 손을 잡아 론 놀에 대항하고 캄보디아는 내전에 휩싸인다. 결과적으로 백만 명 이상이 캄보디아에서 죽었다.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시작한 폭격이 그럭저럭 먹고살던 캄보디아를 공중분해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여담으로, BBC 기자가 헨리 키신저에게 킬링필드에 대해 책임을 느끼냐고 묻자 키신저는 이렇게 답했다. "I feel just as responsible as you should feel for the Holocaust because you bombed Hamburg."(P.174) 함부르크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원인에 영국도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함부르크 홀로코스트는 영국이 나치에 폭격하기 전에 일어났고, 킬링필드는 미국의 폭격 후에 일어났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Under the guise of choice, do something, or do nothing, but if we do something, do enough to achieve our goals (p.193)


반대로, 질서의 관점에서도 헨리 키신저의 외교 신조를 살펴보겠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거나 아니면 아예 시작도 말아라. 애매하게 적당히 하면 얻는 건 하나도 없다. 칼을 한 번 뽑았으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한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목적이 있다면 전쟁 확대도 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헨리 키신저 전임이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때부터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키신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미 시작된 전쟁이었기에 미국은 맥없이 빠질 수 없었다. 빠질 때 빠지더라도, 명분이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에는 나름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베트남 공산화를 막아, 동남아시아 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것.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협상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맥없이 꼬리 내리는 건 스스로가 종이호랑이임을 자처한 셈이었다. 따라서, 키신저로선 그 목표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전쟁에서나 협상에서나 북베트남에게 밀리는 형세를 보인다면 국제적으로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공산주의 국가에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이 밀린다는 건 공산주의가 우세한 정치 시스템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과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북베트남의 피해도 엄청났지만, 서로 똘똘 뭉친 그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난 수 천년 간 중국의 견제도 버텼고, 프랑스로부터도 저항해 승리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반대로 남베트남은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부패 정권이 연이어 들어섰고, 북베트남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때, 미국 대사관에 북베트남군이 침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북베트남의 공세 속에서 시작된 협상은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철하게 만들었다. 미국으로선 당장은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위해서, 길게는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공산주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에 함부로 대항할 수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줘야 했다. 정의가 아닌 질서를 지지했던 헨리 키신저는 전쟁을 이어나감으로써 무지막지한 희생자들을 만들고, 종국엔 북베트남과 만족할만한 협상을 끌어냄으로써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Kissinger remains consistent that one shouldn't look to history to find the causes of present problems or the origins of blowback. Too much information about the past makes for paralysis. (...) Rather than learning from the past to understand the present, Kissinger still sees the primary function of history as a way to imagine the future... (p.221)


과거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미래를 설정하기 위해 기능해야 한다. 이를 철저히 따른 헨리 키신저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1814년 비엔나 회의를 통해 파악한 힘의 균형과 세계 질서를 거울 삼아 자신의 외교 정책에 덧댔다. 저자는 인간미 없는 키신저의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위 문장을 적었고, 질서를 택한 키신저도 이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정의와 질서 사이에서 정의를 지향한 그렉 그렌딘의 활자를 따르다 보면, 어느새 헨리 키신저는 세계 곳곳에서 사람을 죽이고, 자국민도 타지에서 희생시킨 철천지 원수가 된다. 책에서 그는 힘의 논리를 따르기 위해 윤리의식이 철저히 부족한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정책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에도 정의보단 질서를 택한 그의 결정을 보면, 인간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당대 미국이 정의를 택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자유질서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떨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마냥 그를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정의냐 질서냐. 누군가의 희생도 정당화될 수 없고, 약해지는 국력도 무시할 수 없기에 정답 없는 논쟁인 것만 같다. 다만, 헨리 키신저는 질서를 택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했다. 역사에 if는 없기에 과거에 정의를 택하네 마네는 쓸 데 없는 논쟁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질서를 택함으로써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둘 사이의 선택으로 인해 더 이상 희생양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지 않을까. 


이와 같이 책은 정의와 힘의 논리 사이를 고민하게 만들고, 후자를 선택한 헨리 키신저의 외교정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됐어야 하는지를 살핀다. 다만, 베트남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견제가 잘 이뤄졌는지 그리고 베트남전을 발판 삼아 키신저가 데탕트, 이스라엘-이집트, 중동, 앙골라 등에서 얼마나 활약할 수 있었는지는 제대로된 언급조차 하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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