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여다 본 뒤, 다시 만난 세상
새로운 커뮤니티는 계속 생길 것이다.
3년 전만 해도 페이스북이 있는데 또 다른 커뮤니티가 과연 필요할까.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공룡인 페이스북에게 먹히진 않을까. 시도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성공한 자가 있으니, 나는 해도 안될 거라는 생각에 지배받고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생활이 좀 더 현실성 있기 합체되며, 사람들은 다양한 가게에 가듯 다양한 커뮤니티를 찾을 거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 활동이 나를 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브랜드 제품을 쓰고 있는지 처럼 내가 무슨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는지가 나를 들어낸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짜의 세상에서 숨기를 즐기는 사람이 주류였다면. 이제 가상과 실제의 세상의 경계가 없어진 진짜 나 자신을 드러내며 관계를 맺어가길 희망한다. 그 흐름이 4차 산업혁명이라 거창하게 이름 붙여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나를 들어다 보는 것부터.
누구에게 맞춰 살기보다 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사는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춘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누구를 위해 맞춰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고 포옹했을 때 우리는 행복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나를 발견하는 것이 외로운 홀로서기가 아닌 다 큰 세상을 만나는 길이라는 것을 다들 아는 것 같다. 나를 알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남들 해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내린 결정으로 이뤄진 삶을 살기 위해선 부모에게 받은 영향 환경에서 받은 영향 등 어릴 적 기억부터 새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현재 내가 겪는 일들을 내가 왜 이렇게 느끼고 기억하는지는 내 과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랑에 굶주린 세대
전쟁 속 보육원에서도 동일한 영양상태로 관리를 받아도 아이의 성장과 건강상태가 차이를 보인 사례가 있다. 이때 건강한 발육상태의 아이들은 끝자락에 있는 침대 아이들이었다. 그 끝에 청소 아주머니가 드나드는 문이 있었고 매일 그 아주머니는 안쓰러운 전쟁고아들을 이뻐하며 눈을 맞추어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살지만 어릴 적 얼마나 공감과 사랑을 표현받으며 살았는지에 따라 자존감의 크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먹고 사는걸 잘 해결해주는 것만으로 보호자의 역할이 다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자란 우리들이 보호자가 되고 사회를 책임지고 가고 있다. 조금 더 따듯한 세상에 대한 공감받는 세상에 대한 욕구가 강한 세대인 것은 이 배경에 기인된 것은 아닐까.
함께 모이는 사람들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힘을 갖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에 공감하는 전국에 전 세계에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들이 모여있을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에 많이 계실 거 같다. 어떤 기준의 커뮤니티로 운영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방향일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기술과 비용과는 또 다른 기준에 대한 이야기. 홀로 지내고 싶지만 홀로 있고 싶지 않은 우리네 인간. 생각의 고리를 물고 들어갈수록 사람에 대해 더 관심이 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게 된다. 지치지도 않고 일을 벌인다며 놀라워하는 지인에게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남들이 좋다는 퇴사하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내가 고민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 나에겐 더 힘이 나는 일이라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살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알아가는 여정이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칙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무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불변의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고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발하리라 [사피엔스]
사람들은 분노, 상처, 실망 그리고 현실적 판단이 꿈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글로 적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꿈을 적지 않으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변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용기를 내서 망령에 맞서는 행동, 삶에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이라고 믿는 행동, 앞으로 나서서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바꿔 놓는다.
- 로렌 헨델 전더 [어떻게 나로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