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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컴퍼스 May 17. 2020

#21. 모던 크루즈산업의 아버지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라인의 창시자, Edwin W. Stephan

아마 크루즈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 한다면 머릿속에 이 두 사람이 생각난다.  바로 현재 카니발 크루즈 라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웨지안 크루즈 라인의 파운더 Ted Arison(테디 에리슨)과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라인의 파운더이자 1대 최고경영자였던 Edwin W. Stephan(에드윈 스테판)이다. 이 사람들은 1960년대 후반 ‘크. 루. 즈’라는 산업, 휴양지로서의 크루즈라는 콘셉트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도 내 인생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한 번 뵙고 싶었던 분들이다. 특히 에드윈 스테판은 크루즈라는 매개체가 없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참전용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드윈 스테판은 앞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작년 11월 8일 금요일 Edwin W. Stephan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마이애미 헤럴드, 플로리다 인사이더, 해외 각 크루즈 뉴스 채널은 에드윈 스테판의 사망 소식을 전한 건 물론,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라인 역시 제일 먼저 인트라넷을 통해 바다 위, 육지 위 전 세계 직원들에게 슬픈 소식을 알렸다.


에드윈이 어떻게 크루즈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의 과거를 살짝 엿보면 크루즈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1931년 12월 5일에 위스콘신에서 태어난 에드윈은 고등학교 졸업 후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미국을 떠났다고 한다. 1954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에드윈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마이애미로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휴가 중에 가진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단순히 돈을 벌고자 카사블랑카 호텔의 벨보이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으로 호텔리어로서 에드윈의 제2인생이 시작되었다, 에드윈은 이후 Biscayne Terrace Hotel을 거쳐, Yarmouth Steamship Co., 그리고 Commodore Cruise Line에 입사하여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Yarmouth Steamship Co., 와 Commodore Cruise Line라는 크루즈 선사에 근무를 하는 동안 그에게는 늘 새로운 형태의 크루즈를 건조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형태의 크루즈라고 한다면 오직 편안함과 오락만을 위해 새로 건조된 크루즈를 말했다. 그동안의 크루즈는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 개조된 크루즈였고, 목적지로 이동을 하기 위한 여객선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현재 우리가 말하고 알고 있는 크루즈, 즉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크루즈 그리고 크루즈 안에서의 생활을 즐기기 위한, 오로지 크루즈 위에서의 휴양을 위해 설계된 크루즈를 설계하고 건조하고 싶었다. 이후 에드윈은 파트너를 찾아 나섰고, 3명의 노르웨지안 선주(Sigurd Skaugen, Anders Wilhemsen and Gotaas Larsen)를 설득해 1969년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라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다음 해 크루즈 Song of Norway가 건조되었고, 1970년 11월 7일 마이애미를 모항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 후 이어서 1971에는 Nordic Prince가 1973년에는 Viking Sun이 건조되어 운항되었다.



에드윈은 단순히 크루즈를 건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크루즈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 방식을 만들기 위해 설계, 건조과정에서 끊임없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바이킹 크라운 라운지이다. 크루즈의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박의 연돌(굴뚝) 옆에 마치 우주선을 닮은 공간을 설치해 바다 뷰를 보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만든 아이디어는 바로 스테판의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이후 바이킹 크라운 라운지는 로열캐리비안 인터내셔널의 시그니처가 되었고, 당시 객실과 레스토랑, 라운지만 있는 단순한 크루즈선의 모습을 깨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바이킹 크라운 라운지는 선박 건조 산업에도 참신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에드윈 스테판이 이뤄낸 큰 성취가 바로 1978년 송 오브 노르웨이(Song of Norway)라는 크루즈를 반으로 잘라 그 사이에 한 블록을 더 넣어 배를 늘린 점이다. 지금이야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당시 그의 아이디어는 크루즈 산업에서 처음 시도한 일이라고 한다. 배를 늘릴 생각을 하다니.. 그에게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크루즈선을 건조할 수 있을까, 어떤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상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로열캐리비안의 플로우 라이더 설치, 센트럼(3층 정도 높이의 홀), 내부 복도(프로머나이드) 콘셉트, 아이스 스케이트장, 아이 플라이(실내 스카이다이빙) , 아쿠아 극장 그리고 10년 전 로열캐리비안의 오아시스호,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선을 건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에드윈 스테판과 같은 리더의 창의적인 사고를 시작으로 이뤄낼 수 있었던 성취, 업적, 상품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에드윈 스테판은 지금의 로열캐리비안 크루즈가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산업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핵심 역할을 해주었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현대 크루즈 산업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공을 인정받아 2009년 CLIA(Cruise Lines International Association, 크루즈 라인 국제 협회)의 Hall of Fame어워즈의 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97년까지 로열캐리비안 인터내셔널의 대표로 근무를 하였고, 그 후 로열캐리비안 크루즈 라인의 부총재로 2003년에 임기를 마쳤다.





에드윈 스테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전 세계를 항해하고 있는 로열캐리비안의 60척의 모든 크루즈선은 그 일주일 동안 크루즈 위 깃발의 반기(half-mast)를 게양했다. 그가 끊임없이 창의 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크루즈선과 그 기회를 준 바다도 함께 그를 애도하고 기억하도록 말이다,


Written by Kim

@bakku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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